나의 여행 이야기 ① 소설가 은희경
[중앙일보] 입력 2011.10.21 04:33 / 수정 2011.10.21 10:04애인 만나러 호주에 갔지요, 그의 이름은 와인이고요
흠뻑 취했답니다, 저 풍경 때문에
와인을 고르는 일이 쉽지 않을 때는 그날의 분위기에 손을 맡기면 된다. 시드니 근교의 헌터 밸리 와이너리에서.언제부터인가 나에게는 ‘당신은 이런 사람’이라는 조건이 주어져 있다. 그리고 그 조건을 충족시키는 반복된 일과가 내 인생이 돼버렸다. 인생의 전반부는 조건을 갖추는 데 보내고, 나머지는 그렇게 얻은 조건을 충족시키려 애쓰며 살고 있는 셈이다. 내가 여행에 매료되는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행이란 잠시나마 ‘다른 조건’ 아래에서 살아보는 일이니까. 낯선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 나로 돌아오는 탄력의 게임, 그 과정에서 생각과 느낌에도 탄성이 생겨나지 않을까.
친구들과는 생맥주로 폭음하지만 나는 혼자서는 으레 와인을 마신다. 와인은 그 향기와 자태가 마치 하찮은 비밀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나를 서서히 뜨겁게 만드는 은밀한 애인 같은 술이다. 와인이라면 으레 프랑스 보르도나 미국의 나파 밸리가 먼저 떠오르지만 호주 대륙으로 행선지를 잡았다. 이왕 ‘다른 조건’을 원하는 바에야 남반구에 가서 취해보고 싶었다고 할까. 그것도 포도 열매는 떨어지고 새 잎은 나기 전인 황량한 겨울의 와이너리에서 나의 8월 호주 와이너리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멜버른의 명물인 퍼핑 밸리 증기기관차에 몸을 싣는다. 새들의 합창을 들으며 숲과 계곡, 햇살과 나무 그늘을 통과한다.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농장은 1877년 세워진 맥윌리엄스 와이너리라 한다. 6대째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린더만 와인 농장은 1882년 이미 국제 와인 전시회에 출품되고 올림픽 공식 와인으로 지정되고 미국의 와인 잡지 ‘Wine & Spirits’에 10번이나 올해의 와이너리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여행 중에 발길을 멈춘다. 세상의 절반을 가득 채운 듯한 수선화 언덕에 앉아 남반구의 봄을 느낀다.매니저에게 드라이하고 향이 복잡하거나 강하지 않고 묵직하지 않은 느낌을 좋아한다고 하자 곧바로 권하는 것이 화이트 와인 세미용(Semillon)이다. 그것은 혀에 살짝 닿은 다음 순간 스며버리듯 새침하고 깔끔한 맛이었다. 향기가 오래 남는데도 지나치게 강렬하지 않아 호감이 갔다. 이어서 화이트 와인 두 종류와 레드 와인 두 종류를 마셨지만 그 첫 맛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리슬링 와인을 한 병 샀지만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비워지리라는 행복한 예감은 또 무엇인지.

몇 군데 와이너리를 들른 뒤 마지막으로 갔던 샹동 와이너리는 특히 세련되고 아름다운 장소였다. 3층 높이의 통유리창을 통해 내다보이는 잘 정돈된 포도밭 언덕. 포도밭을 지나면 작은 호수를 낀 울창한 숲이 나타나고 멀리 언덕 너머로는 산봉우리들이 일렬로 늘어섰고, 그 위로는 몇 개의 흰 구름을 거느린 말할 수 없이 넓고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그 풍경들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담겨 있는 와이너리 카페의 커다란 창. 거기에는 쏟아지는 햇빛과 산들바람까지도 들어 있었다. 그 창가에 앉아 와인을 마셨다. 겨울 와이너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나른한 평화와 달콤한 탈선의 의식이랄까. 등 뒤의 벽에는 책장에 꽂힌 책들처럼 벽을 가득 채운 와인들이 꽂혀 있고.
(사진上) 시드니의 갈매기는 사람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 먹을 것을 나눠 주지 않을 경우 부리로 바짓단을 잡아당기기도 한다. (사진下) 세월을 지우려는 듯 햇빛은 빛나고 시간을 말리듯 책장은 넘어간다. 호주에서 나는 물론 코알라와 캥거루를 만났지만 구경하기 위해 연출된 모습을 본 게 아니었다. 그들이 사는 그대로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신경안정제 성분이 있다는 유칼립투스 나무 위에서 그 잎만 먹고 살며 생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내는 코알라는 평생 200m밖에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숲에 불이 나면 자신의 침실이자 화장실이기도 한 나뭇가지 위에서 그대로 타 죽는다. 유칼립투스 나무가 무성한 야생동물보호구역 안에서 가지 꼭대기에 잠들어 있는 코알라를 발견하거나 숲 사이를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캥거루를 발견할 때마다 관람객들은 그 숲의 주인들에 대한 예의로 조용히 숨을 죽였다.
그레이트 오션 로드는 214㎞나 되는 드라마틱한 해안도로다. 기암절벽 사이로 하늘과 바다가 끝없이 이어진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참전 군인들의 일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건설된 길이라는 설명을 들어서인지 세상의 끝까지 갔다 온 사람들 마음속의 스케일이 느껴진다. 안개 낀 해안선의 거칠고 황량하고 때로 음울한 흐름. 그래서 수천만 년에 걸쳐 남태평양의 파도가 조각했다고 표현하는 거대한 석회암 ‘12사도 바위’ 같은 풍경이 더욱 압도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 거친 바람을 등지고 모래 위에 무릎을 꿇고 청혼하는 젊은이, 그의 맹세는 세월과 함께 풍화되겠지만 그 또한 자연에 속한 일 아닐까.
누구나 호주에 가면 돌아올 때 꼭 데려오고 싶은 세 친구가 있다. 캥거루·코알라·펭귄.이 모든 대기와 바다와 땅의 거친 에너지와 조화의 기운이 호주 와인에 스며 그 향기와 자태를 빚었을까. 물론 이것은 와이너리를 돌며 시음을 하고 취해 돌아올 때의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생각이다. 돌아오는 길은 어둡고 멀었다. 거대한 대륙의 어둠 속에 누운 검은 소와 양들의 휴식이 느껴졌다.
내가 얼마나 멀리 와 있는지 실감이 났다. 농가의 식당에 캥거루와 함께 찍은 결혼 사진이 걸려 있고 맥도날드 가게 앞에는 갈매기가 진을 치고 있는 나라. 세련된 유럽 도시를 닮은 대도시에도 공원의 규모만은 엄청나게 다른 나라. 국민에게 세금을 펑펑 쓰는 게 눈에 보이는 나라. 그야말로 ‘다른 조건’ 안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도 ‘다른 나’다. 내가 알아왔던 나로부터 멀어지는 기분, 이런 날은 인생의 어떤 하루일 것이다. 하지만 그때에 잠깐 드러나는 내가 진짜 나일 수도 있다. 그것으로 됐다. 돌아가면 다시 익히 아는 그 사람으로 살겠지만 이 기분을 느껴 보았으니 나는 100% 똑같은 사람은 아니리라.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부티크 와인(boutique wines)’에 대한 신문 기사를 보았다. 블루 리본의 명성이나 수상 경력, 고급 프랑스 와인이 좋은 와인으로 인식되는 시대는 지났고 개성 있고 모험심 있는 작은 와이너리에서 생산한 와인이 부티크 와인이라는 이름으로 각광받는다는 내용이었다. 이 여정의 마무리로 나는 즉시 승무원에게 호주 와인을 청했다. 비가 뿌리는 차가운 날씨에 와인 잔을 손에 들고 들판을 쏘다니다가 벽난로 앞으로 돌아와 허밍으로 노래 부를 날이 또 오기를. 건배.
글=은희경 사진=이병률
●은희경은 … 소설가. 1959년 전북 고창 출생.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대표작으로 소설 『새의 선물』 『비밀과 거짓말』 『타인에게 말걸기』 『소년을 위로해줘』, 산문집 『생각의 일요일들』 등이 있다. 동인문학상·이상문학상·동서문학상·한국소설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병률은 … 시인.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과 여행산문집 『끌림』을 펴냈다. 현대시학작품상을 수상했다.

'보도, 기사,문학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책 읽는 도시… 북카페, 가을을 맞다<세계일보> (0) | 2011.10.21 |
|---|---|
| [star&] 은희경 … 느슨해지고 싶다는, 빈틈없는 그녀 (0) | 2011.10.21 |
| [스크랩] 2011 천태산 은행나무 걸개 시화전 안내 (0) | 2011.10.20 |
| 심포지엄 [symposium] (0) | 2011.10.19 |
| 인문학 (0) | 2011.1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