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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27회 소월문학상 수상자-이재무시인
신디 3357
2012. 6. 6. 07:18

제27회 소월문학상 수상자-이재무 시인 1958년 충남 부여 출생 한남대 국문과, 동국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83년 무크지《삶의 문학 》에 시 <귀를 후빈다>를 발표하며 등단 난고문학상, 편운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 섣달 그믐』『몸에 피는 꽃 』『 시간의 그물』 『위대한 식사 』『푸른 고집』 『경쾌한 유랑』 <1>-백련사 동백꽃-이재무 동백나무들은 障碍樹였다 암병동 환자처럼 하나같이 괴롭고 불편한 육신들 성긴 자리끼리 스크럼을 짜, 밀린 육성회비로 교무실에 불려가 꾸중 듣고 나오던 그 해 봄날의 그 좁고 긴 낭하처럼 서늘한 그늘 드리우고 임종 지척에 둔 환자가 꾸역꾸역 토해내던 피를 뭉클뭉클 붉게 피우고 있는 꽃숭어리들 지병 안고 사는 자들 소리 죽여 우는 통곡으로 체한 듯 속이 먹먹하다 醜가 만든 美. 추사 김정희 서체 백련사에 가지 말아야 했다 봉해 놓은 과거의 매듭 풀리고 불면의 방 안 가득 질펀하게 울음 쏟아 붓는, 파란만장 시절의 곡절들 귀양에서 풀려나 다시 몸과 마음 꽁꽁 묶어오는 것들 지독히 불운한 인연들 <2>-남겨진 가을-이재무 움켜진 손 안의 모래알처럼 시간이 새고있다 집착이란 이처럼 허망한 것이다 그렇게 네가 가고 나면 내게 남겨진 가을은 김장 끝난 텃밭에 싸락눈을 불러올 것이다 문장이 되지 못한 말(語)들이 반쯤 걷다가 바람의 뒷발에 채인다 추억이란 아름답지만 때로는 치사한 것 먼 훗날 내 가슴의 터엔 회한의 먼지만이 붐빌 것이다 젖은 얼굴의 달빛으로, 흔들리는 풀잎으로, 서늘한 바람으로, 사선의 빗방울로, 박 속 같은 눈 꽃으로 너는 그렇게 찾아와 마음의 그릇 채우고 흔들겠지 아 이렇게 숨이 차 사소한 바람에도 몸이 아픈데 구멍난 조롱박으로 퍼올리는 물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3>-라면을 끓이다-이재무 늦은 밤 투덜대는, 집요한 허기를 달래기 위해 신경 가파른 아내의 눈치를 피해 주방에 간다 입다문 사기그릇들 그러나 놈들의 침묵을 믿어서는 안 된다 자극보다 반응이 훨씬 더 큰 놈들이다 물을 끓인다 비정규직 노동자처럼 실업을 사는 날이 더 많은 헌 냄비는 자부가 가득한 표정이다 물 끓는 소리 요란하다 한여름 밤의 개구리 소리 같다 모든 고요 속에는 저렇듯 호들갑스런 소음이 숨어 있다 어제 들른 숲 속 직립의 시간을 사는 침묵 수행의 나무들도 기실은 제 안에 저도 모르는 소리를 감추고 있을 것이다 찬장에서 라면 한 봉지를 꺼낸다 라면의 표정은 딱딱하고 각이 져 있다 그들이 짠 스크럼의 대오는 아주 견고하고 단단해 보인다 그러나 끓는 물 속에서 그들은 금세 표정을 바꿔 각자 따로 놀며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이다 저 급격한 표정 변화는 우리 시대의 슬픈 기표다 얼마 후 나는 저 비굴 한 사발로 허겁지겁 배를 채울 것이다 도마 위 양파, 호박, 파 등속을 가지런히 놓아두고 칼을 집는다 그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자다 그의 눈빛은 매섭고 날카롭다 그는 세상을 나누기 위해 나타난 자인 것이다 놓여진 것들을 다 자르고도 성이 안 찬 노여운 그는 늦은 밤을 이기지 못한 내 불결한 식욕을, 지난한 허기의 관성을 푹 찔러올는지 모른다 냄비 속 부글부글 끓는 것은 그러므로 라면만은 아닌 것이다 <4>-좋겠다, 마량에 가면-이재무 몰래 숨겨놓은 여인 데불고 소문조차 아득한 먼 포구에 가서 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마량에 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 누워 발가락장단에 철지난 유행가나 부르며 사투리 쓰는, 갯벌 같은 여자와 옆구리에 간지럼이나 실컷 태우다 왔으면, 사람들의 눈총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조석으로 부두에 나가 낚시대는 시늉으로나 던져두고 옥빛 바닷물에 텃밭 떠난 배추 같은 생 절이고 절이다가 그짓도 그만 부질없어 신물이 나면 통통배 하나 얻어 타고 먼 바다 휭, 하니 돌다 왔으면, 그렇게 감쪽같이 비밀 주머니 하나를 꿰차고 와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남은 뜻도 모르는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 거덜냈으면, <5>-낙엽-이재무 시를 지망하는 학생이 보내온 시 한 편이 나를 울린다 세 행짜리 짧은 시가 오늘밤 나를 잠 못 이루게 한다 "한 가지에서 나서 자라는 동안 만나지 못하더니 낙엽 되어 비로소 바닥에 한 몸으로 포개져 있다" 그렇구나 우리 지척에 살면서도 전화로만 안부 챙기고 만나지 못하다가 누군가의 부음이 오고 경황 중에 달려가서야 만나는구나 잠시잠깐 쓸쓸히 그렇게 만나는구나 죽음만이 떨어져 멀어진 얼굴들 불러 모으는구나 <6>-깊은 눈-이재무 마을 회관 한 구석 고물상 기다리며 한 마리 늙고 지친 짐승처럼 쭈그려 앉은, 흙에서 한 때 쟁기가 되어 수만 평의 논 갈아엎을 때마다 무논 젖은 흙들은 찰랑찰랑 얼마나 진저리치며 환희에 들떠 바르르 떨어댔던가 흙에 생 담궈야 더욱 빛나던 몸 아니었던가 논일 끝나면 밭일, 밭일 끝나면 읍내 장터에, 면사무소에, 군청에, 시위 현장에 부르는 곳이면 가서 제 할 도리 다해온 그였다 눈 많이 내렸던 그해 겨울밤은 만취한 주인 싣고 오다가 멀쩡한 다리 치받고 개울에 빠져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저 또한 팔 다리 빠지고 어깨와 허리 크게 상하기도 했던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노동의, 그 오랜 시간을 에누리 없이 오체투지로 살아온 그가 오늘은 바람이 저를 다녀갈 때마다 저렇듯 무력하게 검붉은 살비듬이나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몸의 기관들 거듭 갈아 끼우며 겨우 오늘에까지 연명해온 목숨 아닌가 올 봄 마지막으로 그가 갈아 만든 논에 실하게 뿌리내린 벼이삭을 달디단 가을 볕 쪽쪽 빨아마시며 불어오는 바람 출렁, 그네 타는데 때 늦게 찾아온 불안한 안식에 좌불안석인 그를 하늘의 깊은 눈이 내려다보고 있다 <7>-신발이 나를 신고-이재무 주어인 신발이 목적인 나를 신고 직장에 가고 극장에 가고 술집에 가고 애인을 만나고 은행에 가고 학교에 가고 집안 대소사에 가고 동사무소에 가고 지하철 타고 내리고 버스 타고 내리고 현관에서 출발하여 현관으로 돌아오는 길 종일 끌고 다니며 날마다 닳아지는 살[肉] 끙끙, 봉지처럼 볼록해진 하루 힘겹게 벗어놓고 아무렇게나 구겨져 침구도 없이 안면에 든다 <8>-웃음의 배후-이재무 웃음의 배후가 나를 웃게 만든다 자꾸 웃음이 나온다 밥 먹으면서 웃고 길 걸으며 웃는다 앉아서 웃고 서서 웃고 누워서 웃는다 수업 하다가 웃고 차 타면서 웃는다 잠자다 깨어 웃고 소리 내어 웃고 소리 죽여 웃는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몸에 난 사만팔천 개의 구멍을 열고 비어져 나오는 웃음의 가래떡 찡그리면서 웃고 이죽거리며 웃는다 웃는 내가 바보 같아 웃고 웃는 내가 한심해서 웃는다 이렇게 언제나 나는 가련한 놈 웃다가 웃다가 생활의 목에 웃음의 가시가 박힐 것이다 백지의 공포 앞에서 볼펜이 웃고 웃음의 인플루엔자에 전염된 꽃들이 웃고 새들이 웃고 애완견과 밤 고양이가 웃고 가로수가 웃고 도로가 웃고 육교가 웃고 지하철이 웃고 버스가 웃고 거리의 간판들이 웃고 티브이, 컴퓨터가 웃고 핸드폰, 다리미, 냉장고, 식탁, 강물, 들녘이 웃고 산과 하늘이 웃는다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가는 웃음의 장판무늬들 그리다가 돌연 사방팔방 안팎에서 떼 지어 몰려와 두부 같은 삶 물었다 뱉는, 가공할 웃음의 저 허연 이빨들 웃음의 감옥에 갇혀 엉엉 웃는다 그 언제나 즐겁고 신나는 옛날 같은 새날이 와 눈치 보지 않고 눈물 콧물 흘리며 실컷 울 수 있을까 <9>-나무가 흔들리는 것은-이재무 나무가 이파리 파랗게 뒤집는 것은 몸속 굽이치는 푸른 울음 때문이다 나무가 가지 흔드는 것은 몸속 일렁이는 푸른 불길 때문이다 평생을 붙박이로 서서 사는 나무라 해서 왜 감정이 없겠는가 이별과 만남 또, 꿈과 절망이 없겠는가 일구월심 잎과 꽃 피우고 열매 맺는 틈틈이 그늘 짜는 나무 수천 수만리 밖 세상 향한 간절한 그리움에 불려온 비와 바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저렇듯 자지러지게 이파리 뒤집고 가지 흔들어 댄다 고목의 몸속에 생긴 구멍은 그러므로 나무의 그리움이 만든 것이다 <10>-오래된 농담-이재무 바위의 허리에 매달려 소용돌이치며 크게 울고 있는 물방울은 어제 바닥이 험한 냇가를 걸어왔다 그러나 나는 안다 먼 훗날 저 물방울은 아주 고요한 얼굴로 강의 하류를 한가롭게 걸어갈 것이라는 것을 三日樹下 떠돌이 건달인 나는 어제 강의 상류에서 허리가 반쯤 꺾인 채 생을 접고 울고 있는 꽃 한 송이 보고 왔다 그런데 오늘 바람도 없는데 길가 풀 한 포기 웃자란 키 우쭐거리며 방자하게 웃고 있다 오, 님이여, 새삼 생각하노니 삶이란 얼마나 넓고도 깊은 농담인 것인가 <11>-로드 킬-이재무 한밤중, 누워 있던 검은 아스팔트가 벌떡 일어나 먹잇감을 찾아나선다 콜타르 칠한 벽처럼 빗물에 번들거리는 몸, 속에서 먹을수록 커지는 허기가 컹컹, 인접한 산을 향해 짖고 있다 나흘 끼니를 건너뛴 아스팔트 제 몸 무두질하며 달리는 차량들 돌돌 말아 혀 안쪽으로 삼키고 싶다 공복이 불러온 뿌연 안개 속 검은 아스팔트가 바퀴를 굴리며 달리고 있다 질주의 관성은 중력이 낳은 사생아 아스팔트 등에 올라탄 재규어와 쿠거, 바이퍼, 머스탱, 스타리온, 갤로퍼, 라이노, 포니 무소들이 꽥꽥 비명을 지를 때마다 와들와들 산천초목이 떤다 산을 빠져나온, 길 잃은 본능을 잡아먹고 점점 더 난폭해지는 아스팔트 고삐 풀린 저 무한질주를 아무도 막을 수 없다 <12>-경쾌한 유랑-이재무 새벽 공원 산책길에서 참새 무리를 만나다 저들은 떼 지어 다니면서 대오 짓지 않고 따로 놀며 생업에 분주하다 스타카토 놀이 속에 노동이 있다 저, 경쾌한 유랑의 족속들은 농업 부족의 일원으로 살았던 텃새 시절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가는 발목 튀는 공처럼 맨땅 뛰어다니며 금세 휘발되는 음표 통통통 마구 찍어대는 저 가볍고 날렵한 동작들은 잠 다 빠져나가지 못한 부은 몸을, 순간 들것이 되어 가볍게 들어 올린다 수다의 꽃피우며 검은 부리로 쉴 새 없이 일용할 양식 쪼아대는, 근면한 황족의 회백과 다갈색 빛깔 속에는 푸른 피가 유전하고 있을 것이다 새벽 공원 산책길에서 만난, 발랄 상쾌한 살림 어질고 환하고 눈부시다 <13>-나무 한 그루가 한 일-이재무 강물 내려다보이는 연초록뿐인 언덕 위의 집 홀로된 노인 과실수 한 그루 구해 심으니 바람 몰려와 우듬지 흔들다 가고 햇살 잎잎마다 매달려 잉잉거린다 가지 끝 대롱대롱 빗방울 무수한 벌레들의 남부여대 껍질 속 세 들어 살고 꽃 피자 벌 나비 붐비고 구름 커튼 두껍게 그늘 치고 불콰한 노을 귀가에 바쁜 걸음 문득 멈추게 하고 이슬 내린 밤 열매의 소우주에 둥지 틀다 가는 별과 달 나무 한 그루 불쑥 들어선 이후 강물 눈빛 더욱 깊어지고 갑자기 살림 불기 시작한 언덕 부산스레 허둥대기 시작하였다 <14>-단단한 고요-이재무 일 년 중 고요의 힘이 세지는 때는 망종(亡種)에서 몸을 빼 소서(小暑) 쪽으로 느리게 걷는 절기의 빨랫줄 바지랑대 그림자의 키가 가장 작아지는 때 한동안 각축하듯 울어대던 매미 울음 뚝 그친 막간 어슬렁대던 개들도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가 오수 즐기고 숫돌 다녀온 왜낫처럼 날 선 햇살 따갑게 내려 축축한 생각의 물기 휘발시켜 백치의 순간에 이르게 하던, 살구씨처럼 단단한, 이제는 어데 먼 데로 귀양 떠나 죽었는지 소식조차 없는 <15>-무중력 저울-이재무 그는 달고 재는 일로 세상이치 궁구하던 자 꼼꼼하게 저를 다녀가는 세세한 차이들 눈금으로 읽어내 존재들 가치를 증명해 왔다 슬쩍 바람이 몸 얹기만 해도 파르르 진저리 치며 파동 보이던, 바늘 촉수를 누구라서 감히 눈속임할 수 있었겠는가 경중에 따라 위계 매겨온 냉혈한 무게들은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해 왔다 그렇게 평생 판단하고 재단하는 일로 살아온 그가 어느 날 문득 중심축 잃고 난 뒤 기관들 신경 줄 끊어지고 감각들은 몸을 빠져 나갔다 이후 그는 자신이 지금껏 애써 지켜온 추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스스로 부인하였다 생의 위반과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무게의 차이는 가치의 서열일 수 없으므로 기능 상실한 추를 떼어낼 것 세계 안에 편재하는 사물은 각자 저마다의 무게로 고유한 최대치의 절대성을 지녀 살아간다는 것 그러니 무게의 이력들을 더 이상 개관하지 말 것 그리하여 그렇게나 많이 주렁주렁 길고 무거운 전력 담은 벽보와 전단지 인생들이 발길 끊어지고 철저히 버려진 채 그른 고립무원의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하여, 추수 끝난 벌판의 검불처럼 속진의 셈본으로부터 벗어나 생애 처음으로 무려한 자유가 주어졌다
출처 : 시나브로
글쓴이 : Simo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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