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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과 유방 - 문정희

신디 3357 2012. 6. 21. 14:44

 

 

 

 

 

 

문정희

 

 

 

자궁 혹 떼어낸 게 엊그제인데

이번엔 유방을 째자고 한다

누구는 이 나이 되면 권위도 생긴다는데

내겐 웬 혹만 생기는 것일까

혹시 젊은 날 옆집 소년에게

몰래 품은 연정이 자라 혹이 된 것일까

가끔 아내 있는 남자를 훔쳐봤던 일

남편의 등뒤에서 숨죽여 칼을 갈며 울었던 일

집만 나서면 어김없이

머리칼 바람에 풀어 헤쳤던 일

그것들이 위험한 혹으로 자란 것일까

하지만 떼내어야 할 것이 혹뿐이라면

나는 얼마나 가벼운가

끼니마다 칭얼대는 저 귀여운 혹들

내가 만든 여우와 토끼들

내친김에 혹 떼듯 떼어버리고

새로 슬며시 시집이나 가볼까

밤새 마음으로 마을을 판다.

 

 

 

 

유방

문정희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끌어안는다

찌그러지는 유두 속으로

공포가 독한 에테르 냄새로 파고든다

패잔병처럼 두 팔을 들고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유방암 사진을 찍는다

사춘기 때부터 레이스 헝겁 속에

꼭꼭 싸매 놓은 유방

누구에게나 있지만 항상

여자의 것만 문제가 되어

마치 수치스러운 과일이 달린 듯

깊이 숨겨놨던 유방

우리의 어머니가 이를 통해

지혜와 사랑을 넣어주셨듯이

세상의 아이들을 키운 비옥한 대자연의 구릉

다행히 내게도 두 개나 있어 좋았지만

오랜 동안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것이었고

또 아기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나 지금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안고 서서

이 유방이 나의 것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축 늘어진 슬픈 유방을 촬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