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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처럼 빛나는 화가의 작업실

신디 3357 2012. 8. 22. 21:32

 

은하수처럼 빛나는 화가의 작업실

한겨레 | 입력 2012.08.22 18:31

 

 

[한겨레][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남프랑스 투레트쉬르루에 위치한 고 이성자 화백의 아틀리에 탐방기

남편·아이들 빼앗기고
서른넷에 프랑스 유학
현지에서 인정받는 화가로 성공


남프랑스의 투레트쉬르루. 휴양도시인 니스에서 조금 떨어진 산간마을이다. 그곳에 2009년 90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 재불화가 이성자(아래 사진)의 아틀리에 '은하수'가 있다.

그 마을로 가려면 산 중턱으로 난 도로를 따라 꼬불꼬불 들어가서 실핏줄처럼 계곡으로 퍼져 내려가는 샛길을 타야 한다. 승용차가 겨우 비켜가는 좁은 길. 지방 경찰관 두명이 나와 마을에서부터 차들을 막고서야 마을에 이르렀다.

'은하수'는 1997년 이 화백이 설계하고 지역건축가 크리스토프 프티콜로가 지은 작업실. 석회암 암반의 터는 1968년 이 지방의 공공학교에 커다란 모자이크 작품을 설치하고 받은 돈으로 양치기가 살던 작은 돌담집과 함께 사두었던 곳이다. 그는 돌담집만을 여름 아틀리에로 이용하다가 건축가의 도움을 받아 사계절용 아틀리에를 완공했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한국인 작가로 유일하게 자신의 작업실을 지었다고 한다.

얼핏 보면 기름탱크처럼 보이는데, 가까이 가면 두 동의 반원형 건물이 어슷하게 마주 보고 서 있음을 안다. 구조의 단순명쾌한 것이 철학적으로조차 보인다. 앞동은 판화작업을 위한 작업실, 뒷동은 유화작업실 겸 침실로 썼다고 한다. 마주한 두 건물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고 맑은 물이 흐른다. 물줄기는 건물 위쪽 로마시대 유적인 반원형 수조에서 흘러나와 석회암 암반을 타고 내린 뒤 두 건물 사이를 지난다. 원형 수조에 고인 물은 위쪽 수조로 퍼 올려져 끊임없이 순환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길쭉하게 뻗은 희끗희끗한 암반이 밤하늘 은하수처럼 보이고 흰색의 두 건물은 칠월칠석에 만난다는 견우-직녀처럼 보인다.

알래스카에서 오로라 보고
하늘과 별빛에 매료
은하수 연상시키는 작업실 마련


이 화백이 이러한 형태의 아틀리에를 지은 배경을 알려면 그의 과거를 되짚을 수밖에 없다. 이 화백은 한국전이 한창이던 1951년 단신으로 파리로 간다. 해방 전 이종우(1899~1981), 나혜석(1896~1948), 백남순(1904~1994)이 파리에 유학한 적이 있지만 해방 후 파리로 간 첫 한국인 예술가다.

1938년 도쿄 짓센여대를 졸업한 뒤에 바로 결혼해 인천에 신접살림을 차리고 세 아들을 잇달아 낳았지만 남편이 곁을 떠나고 세 아이도 시댁에 빼앗기고 난 뒤 피난지 부산에 홀로 남았던 터. 아이들을 잊기 위해 34살 나이에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못하고 생계 방편도 없는 상태에서 출국한다. 프랑스 미술평론가 파트리크질 페르생은 도불 자체를 이 화백의 행위 가운데 가장 창조적인 행위라고 평가한다.

이 화백은 53년 미술학교인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에 입학해 회화와 조각을 배운다. 이태 뒤 다락방 작업실에서 본 창밖의 풍경을 그린 <보지라르가에 내리는 눈>을 파리 국립현대미술관 전시회에 출품해 <레 레트르 프랑세즈>에 평이 실리면서 화가의 길에 든다. 56년 통계를 보면 당시 프랑스에는 80만명이 여기로, 4만5000명이 돈벌이를 위해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1500명만이 그림을 팔아 생활할 수 있는 직업화가였다고 하니, 이 화백이 얻은 명성이 매우 드문 경우임을 알 수 있다. 그는 58년에 중진급 화랑 라라 뱅시에서 개인전을 열 정도로 승승장구한다. 그는 훗날 "내가 붓질 한번 더 하는 것이 아이들 옷 입혀 학교 보내는 것이고, 밥 한술 떠먹이는 것이라고 자기최면을 걸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그의 화풍은 색면과 붓질에 의한 조형적 요소만으로 이뤄진 추상화. 60년대 후반까지 '여인과 대지'가 주제였다. 69년 뉴욕 체류 중 어머니의 부음을 받고 나서 10여년 동안 그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던 아이들과 땅의 주박에서 풀려나게 된다. 포개져 누워 있는 고층건물에서 영감을 받은 그는 주제를 도시로 옮겨가게 된다. 점점 도시의 중요성이 무르익어, 직선·삼각·사각·원이 뒤섞여 있던 그림은 요철처럼 반으로 쪼개진 원형으로 수렴되는데, 살아있는 묘지 같은 도시가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상생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이를 바탕으로 어려서 바라본 산의 모양과 흡사한 이곳에 아틀리에를 짓기에 이른다. 그가 천착하여 다다른 구도는 미래도시를 위한 설계도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는 79년 <투레트의 밤>을 시작으로 하늘과 별을 담기 시작하는데, 80년부터는 <극지로 가는 길> 시리즈를 시작한다. 알래스카 상공을 지나는 비행기에서 본 만년설의 빙하와 황홀한 오로라를 보고 그의 시선은 하늘에 고정되어 꿈꾸던 이상도시의 이미지를 하늘로 옮겨놓게 된다. 아틀리에를 '은하수'라고 이름지은 것도 그런 연유다. 그는 작업실을 두고 "내 인생의 완성을 시도한 작품"이라고 말한다. 이후 그의 활동은 일종의 '작품 속 작품 만들기'. 생전의 이 화백은 놀러온 손자들도 징검다리 아래 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할 정도로 '은하수'를 끔찍하게 아꼈다고 전한다.

투레트쉬르루시에서는 아틀리에에 스민 작가정신을 기려 2010년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영구 보존하기로 했다. 셋째 아들인 신용극 유로통상 회장은 기념관으로 바꾸어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집주인이 은하수로 거처를 옮겨가고 땅 위의 은하수에는 단아한 연꽃이 피었다. 뒤돌아 나올 즈음 이 화백이 심어 가꾼 서양자두가 툭툭 떨어졌다.

투레트쉬르루(프랑스)=글 임종업 기자blitz@hani.co.kr

사진제공 이성자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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