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수첩/국내여행

붉게 타오르고 간다, 가을이…

신디 3357 2012. 10. 27. 05:09

 

아웃도어

붉게 타오르고 간다, 가을이…

오백장군봉과 병풍바위 아래 끝없는 숲의 바다…
울긋불긋 오색단풍과 파란 하늘, 눈앞에 탁 트인
서귀포 앞바다의 조화에 취해 걸음을 뗄 수 가 없다
세계일보 | 입력 2012.10.25 17:52 | 수정 2012.10.25 18:08

 

 

[세계일보]

유홍준씨는 최근 펴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편'에서 "'제주도의 한 곳을 떼어가라면 어디를 가질 것인가'라고 물으면 무조건 '한라산 영실'이라고 답할 것" 이라고 적었다. 그는 "영실은 우리나라에서,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환상적이면서 가장 편안한 등산길" "영실을 안 본 사람은 제주도를 안 본 거나 마찬가지"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general_image

영실을 거쳐 윗세오름을 향하면 백록담 봉우리의 남벽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한라산 주봉이 파란 가을 하늘, 선작지왓의 관목과 어울려 빚어내는 이 풍광은 제주 최고의 절경으로 꼽힌다.

영실(靈室)은 한라산의 서남쪽을 흐르는 계곡으로, 해발 1400∼1600m 지점에 천태만상의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리어 있다. 이 바위들이 영실기암이다. 아래쪽의 오백장군봉과 위쪽의 병풍바위로 나뉜다. 영실기암이 서있는 이 거대한 계곡의 모습이 석가여래가 불제자에게 설법하던 영산(靈山)과 비슷하다고 해서 영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실(室)은 계곡을 뜻한다. 옛 문헌에는 영곡(靈谷)이라는 이름도 등장한다. 굳이 유홍준씨의 찬사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영실은 한라산에서 오래전부터 가장 아름다운 등산코스로 꼽혔다. 영실은 존자암길, 한대오름, 용진계곡과 더불어 제주에서 손꼽는 단풍명소이기도 하다.

general_image

영실 등산로는 휴게소에서 시작해 오백장군봉을 거쳐 해발 1700m인 윗세오름까지 오르는 3.7㎞ 구간을 말한다. 휴게소에서 오백장군봉까지 1.5㎞, 오백장군봉에서 윗세오름까지 2.2㎞이다. 백록담까지 오르려면 관음사 코스(8.7㎞), 성판악 코스(9.6)㎞, 돈내코 코스(7㎞)를 택해야 한다.

영실 등산로를 따라 윗세오름까지 오르면 크게 4개의 구간으로 나뉘어 각기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진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영실 초입에 들어서자 울창한 숲으로 뒤덮인 완만한 흙길이 이어진다. 단풍나무와 복자기나무가 빼곡한 이 숲길은 붉은색, 노란색 단풍으로 물들어 있다. 한라산 국립공원 직원은 전날까지 이틀 동안 바람이 워낙 강하게 불어 잎이 많이 떨어졌다고 아쉬워했지만, 그래도 단풍의 정취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general_image

영실 기암과 단풍

단풍에 취해 20여 분쯤 걸었을까, 어둑어둑한 숲길이 조금씩 환해지더니 가파른 능선 허리춤에 올라선다. 저 멀리 병풍처럼 둘린 수백 개의 뾰족한 기암괴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백나한상으로도 불리는 오백장군상이다. 능선을 따라 산 위로 올라갈수록 기골이 장대한 오백장군상이 점점 더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오백장군상 허리 아래를 감싸고 있는 나무들도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있다. 워낙 고지대여서 절정이 지나고 빛이 바래기 시작했지만, 오히려 그게 더 은은한 멋을 자아낸다.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솟아 있는 이 오백장군상의 호위를 받으며 돌계단을 오르자 사방은 온통 키 작은 관목의 세상이다. 이 코스가 영실 등산에서 가장 경사가 급한 구간이다. 오백장군상과 병풍바위를 아래로 내려볼 수 있는 1600m 산등선에 이르자 발 아래로 끝없는 숲의 바다가 펼쳐진다. 그 뒤로는 서귀포 모슬포 해변과 가파도·마라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장쾌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general_image

이 장관을 뒤로하고 병풍바위를 지나자 세 번째 풍경이 등산객을 반긴다. 울창한 구상나무 숲 사이로 울퉁불퉁한 현무암 밭이 나타난다. 징검다리를 건너듯 이 바위들을 건너뛰며 구상나무숲을 빠져나오자, 다시 평탄한 산길이 이어진다. 윗세오름에 다가온 것이다. 윗세오름은 한라산 위에 있는 세 개의 오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아랫것부터 족은오름·누운오름·붉은오름이라고 부른다.

족은오름을 향해 몇 발자국이나 옮겼을까, 드디어 영실 등산의 하이라이트가 펼쳐진다. 홀연히 한라산 주봉인 백록담 봉우리가 빛을 발하며 웅혼한 자태를 드러낸다. 머리털이 없어 두무악(頭無岳)이라고도 불리는 백록담 봉우리의 남쪽 벼랑이다. 두무악을 보며 붉은오름으로 향하는 길은 선작지왓 위에 놓여 있다. 선작지왓은 제주도 방언으로 '돌이 서 있는 밭'이란 뜻으로, 크고 작은 작지(자갈의 제주 방언)가 많아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조릿대, 시로미 등 이름도 생소한 키 작은 나무가 덮인 관목 숲 위에 불끈 솟은 백록담 봉우리가 청명한 가을 하늘과 어울려 빚어내는 풍광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해발 1700m인 윗세오름에 새벽 서리가 내렸다고 하는데, 한낮에는 따스한 가을 햇볕이 가득하다.

선작지왓은 한라산 최고의 절경으로 꼽히는 곳. 이곳에 봄이면 붉은색 철쭉이 만발하고 겨울이면 새하얀 설원이 펼쳐지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하산길에도 선작지왓과 오백장군봉 아래 숲의 바다가 빚어낸 아름다움에 취해 걸음을 늦춰 천천히 걸으며 길 위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제주=글·사진 박창억 기자daniel@segye.com

[Segye.com 인기뉴스]

ⓒ 세상을 보는 눈, 글로벌 미디어세계일보 & 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