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수첩/국내여행

외국인이 반한 한국(64) 미국인 카일의 올레 완주기

신디 3357 2012. 11. 23. 16:50

 

돌고래도 만나고 해녀도 만나고, 늘 새로운 길 … 아예 살러 갈랍니다

 

외국인이 반한 한국(64) 미국인 카일의 올레 완주기

 중앙일보 | 나원정 | 입력 2012.11.23 03:34 | 수정 2012.11.23 08:18

 
제주 올레는 기본적으로 해안선을 따라 걷는 길이다. 제주의 푸른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1코스 성산포가는길에서. 권혁재사진전문기자

내가 제주도에 처음 간 건 1997년 1월이다. 혹한의 한라산에서 치른 강렬한 신고식은 내 가슴에 제주도라는 작은 불씨를 남겼다. 2009년 제주올레를 알고부터는 더 뻔질나게 제주도를 들락거렸다. 부산 토박이 아내와 함께 나는 제주올레 모든 코스를 완주했다.

 

 

 

왜 자꾸 제주도에 가느냐고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매번 다른 일화를 꺼내들곤 했다. 이렇게 운을 떼면서 말이다. "2009년 6월 아주 화창한 여름날이었죠…."

  그날 나와 아내는 제주올레 5코스를 걷고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해안선을 따라 난 길 위로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인적 없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수영하다가 걷다가 그렇게 한가로이 노닐다가 저녁 노을을 맞았다. 하루 종일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지난 2월 제주올레 10코스 사계 해변. 어디서도 본 적 없는기이한 모래 둔덕이 마음을 끌었다.  이듬해 1월의 제주도는 내게 겸허함을 가르쳐줬다. 우리는 바다를 끼고 다가올 듯 다가오지 않는 성산일출봉을 향해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우도와 말미오름이 위용을 드러냈다. 놀랄 만큼 추운 날이었다. 출발이 늦은 탓에 1코스를 다 걸었을 때는 이미 사방이 어두워져 있었다. 우리는 해녀의 집에서 몸을 뉘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해녀 주인장이 내준 갈치구이와 호박죽을 배불리 먹고 마당으로 나섰다. 전날의 추위를 교훈 삼아 보온성이 완벽한 내복을 비롯해 거위털 코트, 울로 짠 모자까지 개미 한 마리 드나들 틈 없이 중무장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얼어죽겠다고 아내에게 푸념하고 있었다. 그때 해녀 주인장이 바다로 물질하러 간다면서 가뿐한 잠수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의 나이 65세.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해 5월의 제주도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우리는 9코스와 10코스를 걸으며 제주의 봄을 한껏 음미했다. 화순해수욕장의 새하얀 모래밭과 천방지축 솟아오른 용머리해안의 바위가 빚어내는 절경은 이 세상의 풍경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오후 느지막이 송악산 입구 횟집에서 갓 잡은 문어·멍게·소라·해삼에 산방산과 형제섬의 비경을 안주 삼아 감귤 막걸리를 마셨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지난 2월에는 아내와 12일간 내리 걷기만 했다. 우도를 아우르는 제주올레 1-1코스에서 생각지도 못한 돌고래를 만났다. 바둑돌처럼 반질반질한 돌고래 한 쌍이 수면에 반원을 그리며 천진하게 놀고 있었다.

 

 

제주 올레 4코스 끝을 알리는 '간세'에 기대어. 7일째 되던 날은 5코스 끝자락에서 궁수 무리를 만났다. 백발백중의 활 솜씨에 감탄했더니, 그들이 얘기나 하다 가라고 우리를 붙잡았다. 알고 보니 다들 서울의 직장에서 은퇴하고 제주도에서 국궁을 즐기며 사는 풍류객이었다. 막 쪄낸 문어 숙회에 소주잔을 기울이다 한참만에야 작별 인사를 했다.

 미국의 부모님을 제주도로 모신 적도 있다. 지난 7월의 일이다. 두 분 모두 고령이지만 타고난 모험가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올해로 80세인 아버지는 우리가 곤히 잠든 새벽에 혼자 성산일출봉 정상까지 걸어갔다 오기도 했다. 구름 탓에 일출을 못 봤다고 100살에 되기 전에 꼭 다시 성산일출봉에 오르겠다고 다짐까지 했다.

 요즘 나와 아내는 내년쯤 유럽 해안선을 완주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다 제주올레 덕분이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7000㎞의 여정을 마치고 나면 제주도에 정착할 작정이다. 멋진 게스트하우스를 차려 오래도록 섬에 깃들고 싶다.

 정리=나원정 기자  < joongang.co.kr >

 중앙일보·한국방문의해위원회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