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one day
[ESSAY] 말 한마디가 가져다준 행복
신디 3357
2013. 1. 9. 07:06
[ESSAY] 말 한마디가 가져다준 행복
민순혜 ·대전 중구 입력 : 2012.09.13 22:53
남 불행한 일 수다 떨던 아주머니 어느 날 목욕탕서 넘어져 입원…
동생들 돌보다 결혼 못 하던 친구 '올가을 시집갈 운세' 위로 했더니
9월에 온 전화 '좋은 사람 만났어' 보이지 않는 '말의 힘' 새삼 느껴
민순혜·대전 중구
오늘은 이웃 아주머니를 초대하여 어머니와 함께 점심을 대접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전화가 왔다. 며칠 전 목욕탕에서 넘어져서 심한 골절상을 입고 지금 정형외과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하는 게 아닌가. 병원에서 치료에 한 달 남짓 걸릴 것 같다고 했다면서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깜짝 놀랐다. 건강한 편인 아주머니는 자주 우리 집을 찾아왔다. 재작년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몸이 편치 않으신 어머니를 걱정하며 대화 상대가 되어 주셨다. 오늘 점심을 준비한 것도 그런 고마움을 조금이라도 갚기 위함인데 이게 무슨 변고인가 싶었다. 한편으로는 '남의 잘못된 일을 습관적으로 말씀하기를 좋아하시더니 당신도 다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호탕한 성격인 아주머니는 웃을 때도 다소 과장되게 큰 소리로 웃곤 했는데 어머니는 오히려 그런 면이 무척 좋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선지 어머니는 맛있는 음식이라도 하시면 먼저 아주머니를 부르셨다. 하지만 그분은 어머니께 나쁜 소식부터 전하는데, 나는 정말 너무도 듣기가 싫었다. 누구는 다리가 부러져서 며칠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또 누구는 체해서 며칠 못 먹었고, 또 누구는…. 참다못한 내가 "아주머니, 그만 좀 하세요!"라고 볼멘소리로 말하면 어머니가 걷다가 넘어져서 다칠까 봐 걱정이 되어서 그런 거라고 둘러댔다. 그런데 오늘 갑작스러운 아주머니의 골절상 소식을 듣자 문득 '말이 씨가 된다'는 옛 속담이 떠올랐다. '자주 남이 다친 이야기를 일삼더니 결국 자신도 다친 게 아닌가'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 경우는 되도록 남의 불행한 이야기는 피해간다. 낙천적인 내 성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대개는 긍정적인 면을 강조한다. 긍정적인 표현이 사실 말하기도 편하다. 내 친구들은 유난히 독신(獨身)이 많은데 그중 나와 친하게 지내고 서로 속엣말을 하면서 외로움을 나누던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마저 편찮으셔서 집안 사정이 어려웠다. 그러니 마흔이 되어도 동생들 학비며 생활비 걱정으로 밤엔 제대로 발을 못 펴고 잔다고 했다. 동생들이 학업을 마치고 모두 취직하면 자신은 수녀원으로 간다면서 진짜로 들어갈 채비를 하기도 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어느 날 그 친구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남동생이 동네 불량배들과 싸우고 경찰서로 연행되었는데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했다. 간간이 속을 태우던 막냇동생이 그예 일을 저질렀나보다. 그날 저녁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시내 찻집에서 만났는데 얼굴이 창백했다. "산다는 게 뭔지, 이제 더 이상 사는 것이 싫다"고 했다. 그때는 어떤 위로의 말도 그 친구한테는 소음일 뿐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해야 실의(失意)에 찬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을 안겨줄 수 있으려나…. 한 오라기 희망의 끈을 던져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튿날 친구네 집으로 찾아갔다. 친구가 집을 나오기 싫다고 해서였다. 나는 "동생은 이번 일로 정신을 차릴 거야"라며 그녀를 위로하였지만 내 목소리가 허공에서 울리는 듯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했다. "우리 집에 매일 집안일 도와주러 오는 도우미 아줌마, 너도 알지? 그 아줌마가 관상 조금 보지 않니! 어제 마침 네 동생 이야기를 했더니 네 사진이라도 좀 보자고 해서 보여줬지. 그런데 말이야, 네가 이번 가을에 아주 이상적인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한다는구나!" 그 친구는 물론 듣는 척도 안 했다. 그저 나만 헛바람을 불듯 지껄였다. 공허함이 뒤끝을 스칠 뿐이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해 여름이 지났다.
그리고 그해 9월 초 오랜만에 그녀한테서 전화가 왔다. 나는 또 무슨 나쁜 소식인가 해서 가슴이 철렁했다. 한데 뜻밖에도 친구의 목소리가 밝았다. "무슨 좋은 일 있는 거야?" "너희 집 그 도우미 아주머니 말이 딱 맞더구나!" 갑자기 이게 웬 소린가 했다. "으~응? 무슨 말이었는데?" "지난봄에 말한 거. 나, 가을에 결혼한다고 했던 거 말이야."
'우리 집에 오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그런 말을 했다고?' 의아한 듯 되물으려던 찰나 내 머릿속에서 섬광처럼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실은 도우미 아주머니가 한 말이 아니라 친구가 기운을 차리도록 도와주기 위해 내가 대충 좋은 말을 지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정말로 그해 가을 결혼해서 지금껏 행복하게 잘살고 있다. 더구나 마치 내가 중매라도 서준 양 나를 볼 때마다 갖은 정성으로 대접을 한다.
여러 차례 사실을 털어놓고 싶기도 했지만 차마 고백하지 못했다. 다만 다른 사람들한테 한 예(例)로 들면서 "남에게 덕담을 하는 건 돈도 들지 않으면서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말한다. 오늘 아침 이웃 아주머니의 골절상 소식을 듣고 문득 그 친구가 생각이 난 건 그런 연유에서였다. 새삼 보이지 않는 '말'의 힘이 느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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