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축소’의 논리로 해부한 일본인론으로, 저자는 ‘축소지향’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일본의 고전, 역사, 현재의 과학기술 분야를 모두 아울러 일본인을 해부하고 있으며, 일본 고전 문헌에 대한 자료와 그간의 일본, 일본인론에 대한 저자의 견해 및 비평을 피력하면서 문화 현상을 중심으로 일본인을 투시해 본, 객관적인이고 중립적이며 그럼으로써 가혹한 분석이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는 확대를 의미하는 접두어는 있지만 축소를 나타내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일본어는 그 반대다. 세계에서 가장 짧은 형식의 시를 만든 것은 일본인이다. 이처럼 저자는 ‘축소지향’을 통해 ‘일본인’이라는 매듭을 차곡차곡 풀어나간다. 또한 저자는 일본은 확대지향적이었을 때 언제나 패배했다고 얘기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이나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것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한편 그들의 뛰어난 문화는 모두 ‘축소지향’에서 비롯된다고 얘기한다. 일본의 뛰어난 발명품들을 떠올려보면 이 점은 확연히 드러난다. 그래서 저자는 대국이 되고 싶으면, 더 작아지라고 일본에 충고한다.
이처럼 저자는 ‘축소지향’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일본, 일본인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에 대한 동경과 분노가 교차하곤 하는 우리의 의식지형에서, 이 책은 일본, 일본인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담론을 제공하고 있다.
저자 : 이어령(李御寧, 호: 凌宵)
1934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56년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를 발표,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등장한 그는, 문학이 저항적 기능을 수행해야 함을 역설함으로써 ‘저항의 문학’을 기치로 한 전후 세대의 이론적 기수가 되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된 이래, 1972년부터 월간 『문학사상』의 주간을 맡을 때까지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 여러 신문의 논설위원을 역임하며 우리 시대의 논객으로 활약했다.
1967년 이화여자대학교 강단에 선 후 30여 년간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석좌교수이다. 그는 시대를 꿰뚫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명 칼럼리스트로만 활약한 게 아니라 88서울올림픽 때는 개ㆍ폐회식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문화 기획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1980년 객원연구원으로 초빙되어 일본 동경대학에서 연구했으며, 1989년에는 일본 국제일본문화연구소의 객원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1990~1991년에는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저서로는 『디지로그』『흙 속에 저 바람 속에』『지성의 오솔길』『오늘을 사는 세대』『차 한 잔의 사상』 등과 평론집 『저항의 문학』『전후문학의 새물결』 『통금시대의 문학』『젊음의 탄생』이 있고, 어린이 도서로는 「이어령의 춤추는 생각학교」시리즈 등이 있다.
디지로그(Digilog)는 아날로그 사회에서 디지털로 이행하는 과도기, 혹은 디지털 기반과 아날로그 정서가 융합하는 시대의 흐름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그는 그의 저서 『디지로그』에서 현재 우리가 한때 ‘혁명’으로까지 불리며 떠들썩하게 등장했던 디지털 기술은 그 부작용과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시 아날로그 감성을 불러들이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지적해준다. 시대를 읽는 특별한 눈을 가진 그는 우리에게 선사하는 새로운 사명으로 디지로그 시대의 개척자이자 전도사가 되었다. 한국이 산업사회에선 뒤졌지만 정보화사회에선 선두주자로 나설 수 있음을 일찍부터 설파한 그가 이제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디지로그 시대의 개막’을 선언한다. 물리적 나이로 보자면 분명 노학자이지만, 그는 디지털 미디어를 매개로 한 문명전환의 시기에 누구보다도 앞서 디지털 패러다임의 한계와 가능성을 몸소 체험한 얼리어댑터이다.
그의 서재에는 7대의 컴퓨터와 2대의 스캐너, 무선 공유기, 프린터 등 각종 디지털 장비가 자리한다. 7대의 컴퓨터를 직접 네트워킹했다. 그는 컴퓨터들을 이용해 직접 자료를 모으고, 검색하고, 정리하고, 자신의 지적 회로망에 연결한다. 그에게 컴퓨터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뇌의 확장된 영역이 되고, 그가 선창하는 디지로그 세상을 몸소 살고 있는 인간임을 증명한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1963년 「경향신문」에 연재 에세이 형식으로 발표된 글을 모은 것으로 처음으로 이 땅에 한국 문화론의 기치를 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으로 이어령은 ‘젊은이의 기수’ ‘언어의 마술사’ ‘단군 이래의 재인’으로까지 불렸다. 또한 대만에서 출간되었을 때는 임어당으로부터 ‘아시아의 빛나는 거성’으로 칭송받기도 했으며 일본에서는 저명한 문화 인류학자 다다 교수가 그가 읽은 책 가운데 가장 감동을 준 세 권의 책 가운데 하나로 꼽을 정도였다. 영문으로 번역되어 나갔을 때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었다. 이 책은 한국의 문화를 최초로 분석해 낸 기념비 같은 것이면서도 ‘젊다’. 또렷하고 거침없는 표현도 그렇거니와 한국의 건축, 의상, 식습관, 생활양식에 대한 예리하고도 통찰력 있는 지적은 지금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방대한 지식에 기반하여 한국의 풍습을 중국과 일본과 비교하면서 동서고금의 사상을 가리지 않고 적용하는 자유로운 그 사고방식과 이질적으로 보일 수 있는 요소들을 조화롭게 엮어내는 글재주 역시 비상하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일본 고전 문헌에 대한 자료와 그간의 일본, 일본인론에 대한 저자의 견해 및 비평을 피력하면서 문화 현상을 중심으로 일본인을 투시해 본,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며 그럼으로써 가혹한 분석이다. 일본인을 바라보는. 시대를 초월한 근본적인 통찰을 제공하며 인접국인 일본에 대한 피상적 이해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둥지 속의 날개』(상,하)는 1978년 월간 「한국문학」에 ‘의상과 나신’이라는 제목으로 8회 연재를 하다가 도중에 저자의 건강상 이유로 중단했던 작품이다. 분망한 나날과 갖은 고초 속에서 저자인 이어령의 문학적 열정을 모두 쏟아 부었던 작품이라 그런지 세월이 갈수록 유난히 애정을 느끼게 되는 소설이라고 한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산업화가 한창이던 70년대서 80년대의 초반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영원한 내면세계를 다루려 한 소설이기에 산업화와 도시화라는 시대상황과 관계가 없는 이야기이다. 그러면서도 광고라는 새로운 직업을 소재로 하였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문명 비평적 요소도 없지 않다.
오랫동안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여겨져 온 이어령. 문학박사, 교수, 장관 등 다채로운 이력과 타이틀을 지닌 그는 과거 무신론자였다. 하지만 칠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 세례를 받고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이러한 이어령의 모습을 담은 책이다. 말하자면 ‘(무신론자의) 신앙 입문기’라고 할까. 지식인 이어령이 아닌 그리스도교 신자 이어령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영성’에 관한 참회론적 메시지와 함께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인생의 후반에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어령. 존재 자체의 변화로 인해 그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지성과 영성의 문지방 위에서, 그는 지성을 넘어선 영성을 추구하고 있다. 세례를 받았고,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를 냈다. 생명과 영성을 언급하며 새로운 글쓰기에 나섰다. 지나온 세월 동안 한국의 대표지성으로 이름을 날린 그가 새로운 변화를 꿈꾸며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훼방의 문화에서 응원의 문화로 물꼬를 돌리면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투사가 아니라 소리꾼의 감동이 이끄는 사회가 오고 역사는 과거의 부정에서 미래의 창조로 날개를 달 것이다.
<차례>
제1장 일본 문화론의 출발점
환상의 옷을 입은 일본론
포크와 젓가락
작은 거인들
‘축소’의 문학적 상상력
제2장 축소지향의 여섯 가지 모형
이레코형
쥘부채형
아네시마 인형형
도시락형
노멘형
문장형
제3장 자연물에 나타난 축소문화
밧줄과 수레바퀴
축경-풍경 기호로서의 정원
돌과 모래만의 자연-아름다움 포로
분재-정교한 실내악
꽃꽂이-우주의 꽃잎
상자 속에 들어간 작은 신들
제4장 인간과 사회에 나타난 축소문화
다다미 4조 반의 공간론
달마의 눈꺼풀과 부동자세론
‘이치고이치에’의 문화
주객일체와 ‘화’의 논리
현대 사회의 하나미치
도구와 사물에 대한 사랑
제5장 산업에 나타난 축소문화
일본 정신과 트랜지스터
축소의 경영학
로봇과 파친코
‘나루호도’의 사고방식
제6장 확대지향의 문화와 오늘의 일본
타인의 땅을 끌어오는 문화
사무라이 상인
넓은 공간에 대한 공포
탈출과 회귀의 일본적 조건
명예 백인의 탄식
도깨비가 되지 말고 난쟁이가 되라
작품해설_왜 지금 ‘축소지향의 일본인’인가-다카노 하지메
후기_『축소지향의 일본인』이 나오기까지
<출판사 리뷰>
세계가 경탄한 최고의 일본인론, 『축소지향의 일본인』
일본의 저명한 시사 정론지인 『프레지던트』지가 1994년에 특집으로 기획한, 지난 100년 동안 출간된 『일본 · 일본인론 명저 10선』에 들었던 바로 그 책. 이 책은 ‘축소’의 논리로 해부한 최고의 일본인론이다. 저자는 이를 통해 일본에 의해 지배되었던 과거의 어두운 이야기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들이 누구인지를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일본을 지적 용기를 가지고 떳떳이 바라보는 시각을 주고자 한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쓰인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서들과 한자리에 놓이며, 일본인들을 감탄케 한 문화 국민론으로서 서구인들의 저작물들에 뛰어나게 앞선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저자 이어령은 그동안 일본인들이 서구적인 것을 추구하고, 또한 자신들을 ‘동양’의 대표인 양 여겼던 착각을 깨닫게 한다. ‘빵과 밥’이 아닌 ‘밥과 밥’을 문화 비평의 잣대로 삼는 만큼 한 나라 국민에 대한 정교한 분석을 행하고 있다.
‘축소지향’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는 일본의 고전, 역사, 현재의 과학기술 분야를 모두 아우르는 근본적인 개념이며, 이를 총 6장으로 나누어 귀납적인 방법으로 일본인의 의식을 분석한다.
1, 2장에서는 빼어난 분석으로 일본인이 부채나 가면, 도시락 등에 세상을 축소하는 풍경을 담아내고 3, 4장에서는 일본 문화 저층부에까지 침투해 치밀한 논증을 펼친다. 5장에서는 논의의 폭을 넓혀 일본인들이 산업문화에서도 축소지향의 잠재적인 의식을 많이 표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 6장에서는, 일본인들이 ‘축소지향’에서 ‘확대지향’으로 지향하는 방향을 바꾸었을 때 그들 역사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 있어서도 불행을 가져왔다는 경고 또한 잊지 않는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누구나 무난히 읽을 수 있는 일본 교양서로서 결코 가볍지 않으면서 깊이 있고 재미있고 읽기 쉽다. 또한 일본인들조차 무릎을 치게 만든 정교하며 절묘한 표현이 ‘역시 이어령이다’라는 감탄을 금할 수 없게 만든다.
‘축소지향’이라는 화두
‘일본’ 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무엇인가. 2차 대전에 참전해 패전국이 되고서도 경제를 부흥시켜 선진국 대열에 당당히 끼어 있는 나라 일본, 트랜지스터와 함께 전자 제품의 나라 일본, 소니의 나라 일본. 그들의 문화를 탄생시킨 것은 무엇일까. 상자 속의 상자, 그 상자 속의 상자… 이런 상자를 만든 국민, 그 국민의 맨 밑바닥 상자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이는 바로 저자 이어령이 일본을 바라보는 화두다.
우선 저자의 메스는 일본어에 들이대어진다. 한국어에는 확대를 의미하는 접두어는 있지만 축소를 나타내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일본어는 그 반대다. 세계에서 가장 짧은 형식의 시를 만든 것은 일본인이다. 저자는 ‘축소지향’을 통해 ‘일본인’이라는 매듭을 차곡차곡 풀어나간다.『축소지향의 일본인』은 일본 문화 깊숙이 박혀 있는, 일본인의 속성을 예리하게 해부해 나간 일본 길라잡이다.
일본론의 세계적 고전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갖가지 관점으로 쓰인 많은 이론서, 문화비평서 등 간행물들이 현재 서점가에 나와 있다.『국화와 칼』과 같은 세계적 고전에서부터 국내 출판물만 해도 다양하다. 이들은 국제정세의 변화나 문화 교류 측면에서 국내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시기적절하게 출판돼 일본 열풍을 일으켜왔으며, 대중의 일본에 대한 지식 욕구를 충족시켜 왔다. 이런 일본론, 일본인론에 대해 단연 선구적인 것이 바로『축소지향의 일본인』이다.『축소지향의 일본인』은 국내 일본론의 원조이자, 세계적 고전이며, 일본의 스테디 베스트셀러다.
믿을 수 있는 일본론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일본 고전 문헌에 대한 자료와 그간의 일본, 일본인론에 대한 저자의 견해 및 비평을 피력하면서 문화 현상을 중심으로 일본인을 투시해 본, 객관적인이고 중립적이며 그럼으로써 가혹한 분석이다. 일본을 바라보는, 시대를 초월한 근본적인 통찰을 제공하며 인접국인 일본에 대한 피상적 이해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한 나라 그리고 그 국민, 한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방향에 편입되지 않은 객관적인 시선이 필요하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축소지향’이라는 하나의 화두를 사용해 편입된 식견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정치, 역사, 문화, 사회, 종교 등 각 분야들로 연결될 수 있는 의식의 방향성으로서 ‘축소지향’을 들고 있다. 일본인들이 지향하는, 그들 의식의 화살표를 예리하게 직시한 것이다. 때문에 이 하나의 화두로도 일본인 스스로를 감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지피(知彼)의 일본론
한국과 일본은 과거 역사의 질곡을 함께해 왔다. 일본과 한국은 아주 오랫동안 역사를 함께하며, 누구보다도 많이 부대껴왔다. 그래서인지 양국의 관계는 항상 단순하지 않다. 현대만 해도 역사 왜곡 교과서 문제,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정신대 위안부 문제, 문화 개방 문제 등이 남아 있다. 월드컵을 협력하여 성공적으로 해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지칭을 어떻게 ‘가깝게’ 만들 것인가.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우리에게 일본이라는 나라를 객관적 차원으로 끌어내 일본에 대한 담론이 가능케 한 저술이다. 저자가 어린 시질 일본 식민지 교육을 받은 체험을 바탕으로 선별한 키워드가 이 책의 타이틀인 ‘축소지향’이다. 이 개념은 한국인의 관점에서 말하는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이를 통해 독자는 일본인의 의식 심층을 알 수 있다. 일본을 제대로 아는 자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일본에 대한 예언 혹은 경고
일본은 확대지향적이었을 때 언제나 패배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이나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것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들은 ‘확대지향성’을 가슴속에 방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본은 그들의 축소지향성이 확대지향으로 변할 때 주변 국가에게도 위험을 주었다. 그들의 뛰어난 문화는 모두 ‘축소지향’에서 비롯된다. ‘확대지향’이 될 때 그들의 섬세한 성품은 변질되고 만다. 참다운 대국이 되고 싶으면, 더 작아지지 않으면 안 된다. 도깨비가 되지 말고 난쟁이가 되어야 일본은 더욱 빛날 것이다.
<yes24 서평 1> : 번역 유감
중학 시절의 단순한 흥미에서 출발하여 결국 대학 시절에 일본어를 전공으로 삼고,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교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가르치는 일을 해보니, 필자의 일본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그다지 깊지 않다는 사실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그리하여 이리저리 일본 문화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손에 집어 들게 된 몇 권의 책들 중 하나가 바로 이어령 선생이 쓴 『축소지향의 일본인(縮み志向の日本人)』이었다.
사실, 일본어를 공부하게 된 지 12년째(군대를 빼면 약 10년째)에 접어드는 지금에 와서야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읽게 된 것은 결코 자랑은 아니겠지만, 역설적으로 일본 문화에 대해 그만한 이해와 내공을 갖추게 된 지금이야말로 이 책을 읽기에는 적기(適期)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시피, 지금 시중에서 우리말로 판매되고 있는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이어령 선생이 1982년에 일본에서 출판한 『縮み志向の日本人』을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다. 이어령 선생 본인이 후기에 언급했다시피, 본래 일본어로 쓰여진 이 책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그리 녹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단 제목부터가 한국어로 정확히 번역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일본인을 대상으로 쓰여진 책이다 보니, 일반적인 한국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나 인명 등도 수없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필자가 바로 앞 문단에서 ‘일본 문화에 대해 그만한 이해와 내공이 쌓인 지금이야말로 이 책을 읽기에는 적기’라 했던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다만, 그러한 점을 고려한다 해도 번역에 있어서의 몇몇 사소한 문제점만큼은 지적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사실, 내용에 있어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지성의 한 명인 이어령 선생의 저서답게, 12년째 일본어에 몸담고 있는 필자로서도 공감하고 감탄할 만한 부분이 많았다.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축소(縮み)’라는 하나의 코드에 맞추어 일본 문화를 분해해서 재조립하는 놀라운 능력은, 다른 학자들이 저술한 여타의 일본문화론과는 분명한 차별성을 가지며, 그 내용은 21세기에 접어든 현재의 일본 문화 상황에 적용해 보아도 여전히 뛰어난 설득력을 가진다.
필자가 지금 이 글을 적는 것은, ‘감히’ 그 내용의 완성도에 대해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원문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다소 세심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넘어가자는 것이다.
일단,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縮み志向の日本人’은 제목부터가 번역하기 어려운 책이다. 이어령 선생이 후기에서 지적한 것처럼, 일본어의 ‘縮み’와 한국어의 ‘축소’는 여러모로 함축된 의미에서 차이가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모 유명 애니메이션 제목에서 ‘かみかくし(神隠し)’를 ‘행방불명(行方不明)’이라고 번역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이 제목의 선정에는 별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 같다. 이것은 번역자의 문제가 아니라 양국의 어휘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부분에 대한 것이 아니다.
자,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서론이 너무 길었다). 『축소지향의 일본인』 한국어판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간에 책의 첫머리를 쫙 펼쳐드는 순간, 다음과 같은 문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 무엇이든 작은 것은 모두 다 아름답다.” - ≪마쿠라노소시(枕草子)≫ 중에서
이 문장은 일본 헤이안(平安)시대의 여류작가 ‘세이 쇼나곤(清少納言)’이 쓴 일본 최초의 수필 작품인 「마쿠라노소시(枕草子)」에 나오는 문구 “なにもなにも、小さきものは、皆うつくし”를 번역한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마지막의 ‘아름답다’ 부분. 원문으로는 ‘うつくし’라고 쓰며, 이는 현대 일본어 형용사인 ‘아름답다(うつくしい)’의 원형에 해당하는 말로서, 얼핏 보면 번역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저 글이 쓰여진 시대에는 ‘うつくし(愛し・美し)’라는 말이 ‘아름답다’ 보다는 ‘사랑스럽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따라서, 저 문장은 ‘무엇이든 무엇이든 작은 것은 모두 다 사랑스럽다’로 번역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번역이 될 것이다. (9p.)
그 밖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 책의 원서와 번역서를 일대일 대조해 보지 않아서 번역상의 정확성 문제는 따지기 어렵지만(373p에서 ‘오니는 밖으로, 복은 안으로(鬼は外、福は内)’를 ‘밖에는 도깨비! 안에는 복!’이라고 번역한 것을 보니 좀 불안하긴 하지만), 인명이나 고유명사를 잘못 표기한 것들이 더러 눈에 띄었기에 몇 가지 지적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위에서 언급한 ‘마쿠라노소시(枕草子)’의 작가 ‘세이 쇼나곤(清少納言)’의 경우, 번역판에서는 ‘세이쇼 나곤’이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 표기된 것이다. 헤이안 시대의 일본 여인들의 이름 뒤에 붙는 ‘쇼나곤(少納言)’ ‘츄나곤(中納言)’ ‘다이나곤(大納言)’ 등의 명칭은 이름이 아니라 직명(職名)에 해당되는 것으로, 위에 언급한 것처럼 ‘세이쇼 나곤’이라고 띄어서 표기해서는 안 된다. 이는 아마도 번역자(이어령 선생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번역한 것으로 알고 있다)가 이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비슷한 예로,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등장인물인 ‘무라사키노 우에(紫の上)’를 ‘무라사키 노가미’로 번역한 부분이 등장한다. ‘무라사키노’를 띄어서 표기한 것도 모자라서 ‘上(うえ)’를 ‘上(かみ)’로 읽는 오류마저 범하고 있는 것이다. (83p.)
그 밖에, 가마쿠라 초기의 가인인 ‘후지와라노 사다이에(藤原定家:‘후지와라노 테이카’라고도 읽는다)’를 현대식으로 그냥 ‘후지와라 사다이에’로 표기한 것이나, 이름의 ‘定家’를 ‘定歌’로 잘못 표기한 것(95p.), 그리고 ‘가모노 초메이(鴨長明)’의 수필 「方丈記(ほうじょうき)」를 ‘호죠키’가 아니라 ‘호초키’로 표기하고, 마찬가지로 ‘方丈(ほうじょう)’를 ‘호죠’가 아니라 ‘호초’로 표기한 것(222p., 230p.), ‘3종의 신기(三種の神器)’ 중 ‘마가타마(曲玉)’을 무리하게 ‘구슬’이라고 번역한 것(다른 용어들은 우리말에 있는 것도 모조리 고유명사로 표기했으면서, 어째서 이것만은 굳이 번역했는지 알 수 없다. 318p.) 등이 눈에 띄는 번역상의 문제점이었다. 일일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고유명사에서 연탁(連濁) 현상을 무시하는 등의 잘못된 표기 또한 자주 눈에 띄었다.
책 뒤쪽을 확인해 보니,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처음 발간된 것은 2002년(초판 1쇄)의 일이며, 그 후 개정을 거쳐 2판 1쇄가 발간된 것은 2008년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참고로, 일본에서 발간된 것은 1982년). 초판 발간 이후, 6년의 시간을 거쳐 수정 2판이 발간되는 사이, 위와 같은 사소한 문제점들이 고쳐지지 않은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를 ‘일본인과는 다른 한국인의 대범한 확대지향성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뒷맛이 씁쓸하다.
서두에서도 잠깐 언급했다시피, 수많은 일본 문화론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 훌륭한 책을, 사소한 번역 미스로 어지럽히게 되는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추후 위에서 언급한 모든 오류들을 세밀하게 수정, 보완하여 보다 완벽한 개정판이 나오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yes24 서평 2> : 한국이 쓴 일본 내용
일본인은 확실히 흥미로운 민족이고 ‘이상한’ 민족이다. 지배받았던 민족의 억울함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보니 그렇더라는 얘기다. 겉 다르고 속 다르다, 융통성이 없다, 변태다 등의 막연한 편견도 물론 아니다. 그들을 설명하고 이해하려면 구체적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 책이 지향하는 ‘축소지향’이라는 키워드는 중요하다. 그들은 의식적으로는 물론 행동상에서도 ‘좁고 작은 것’을 추구한다.
가령 지하철을 탈 때 중간 통로는 텅텅 비워두고 그 좁은 입구 쪽에서 부대끼며 땀 흘리는 그들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데, 그 때마다 나는 널널한 통로 쪽으로 몸을 빼나오기 일쑤인 것이다. 자리에 앉아서도 마찬가지다. 악명 높은 도쿄 지하철 요금을 내고 탔으면서 그들은 ‘앉은 차렷’ 자세로 힘들게 목적지까지 간다. 때때로 ‘쩍벌남’ 같은, ‘일본스럽지 않은’ 자세로 타인을 당황케 하는 이들도 있지만 십중팔구 일본인들은 손바닥만 한 문고판에 시선을 고정시키거나 휴대폰을 응시하며 잔뜩 웅크린 모습으로 앉아 있다.
‘츠메루(詰める)’. 우리말로 하면 어딘가에 무엇을 눌러 담는다는 뜻이다. 누르고 눌러, 담고 담아 큰 것을 작게 작은 것은 더 작게. 바로 ‘축소’의 논리인 것이다. 저자 이어령 선생은 그것을 1800종이 넘는 ‘도시락(벤또弁当)’, 호주머니에 들어가는 문고판과 콘사이스 사전, 다도(茶道)와 ‘4조반의 다다미(畳)’, 우주와 자연을 마당으로 불러들인 ‘세끼테이(石庭)’, 축소지향으로 세계를 재패한 소니(Sony)와 토요타(Toyota) 같은 일본인들의 전통 생활 문화, ‘경제 동물’ 일본인들이 가장 뿌듯해하는 산업 경제 분야 등에서 찾아 조목조목 논증해나간다.(이 부분은 일본어(그리고 전반적인 일본 문화와 문학)를 알면 더 재미있고 깊게 읽을 수 있다.)
허나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그런 것들보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이웃나라인 ‘한국을 모르는 일본인(또는 한국을 모르고 ’일본인론‘을 집필한 서양 학자들)’을 꼬집는 프롤로그, 그리고 ‘확대지향의 일본인’을 다루기 위해 인용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도롯코」와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과 함께 막판에 다루어진 ‘명예 백인’ 일본인에 대한 선생의 일침이었다.
“던힐의 라이터를 가져도, 구찌의 구두를 신어도 일본인은 백인(또는 흑인)이 될 수 없다.” - 와타나베 쇼이치 「레토릭의 시대」 中
백인이 되고 싶어도 절대 백인이 될 수 없는 일본인들. 본인들은 아시아인이 아닌 백인이라고, 그래서 프랑스에선 정말로 ‘명예 백인’이라는 호칭으로 그들을 부른다는 내용에서 나는 냉소와 반감을 동시에 느꼈다. 선생은 와타나베 쇼이치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어느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한국인들에게 ‘우리는 백인이 아니다. 황색 인종이다.’라고 당연한 사실을 주장한 사람은 없다. 일본인은 백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와타나베 씨는 동시에 지금까지 일본인은 백인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미국(과 유럽)에 대한 한국인들의 사대주의는 일본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들은 미국의 것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맹신하고 동경한다. 굳이 일본어로 쓸 수 있는 표현도 엉터리 발음의 ‘가타카나 영어’로 표현하면 엘리트 대접을 받는 곳이 일본이다. 하기사 그들을 지금의 경제대국으로 만들어준 트랜지스터라디오, 자동차, 카메라, 전자산업의 대부분이 구미권에서 왔다는 것을 감안하면 ‘선배격’인 미국과 유럽에 그토록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그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는 것이고 그에 반해 못사는 나라에 대한 동정어린 위선과 북한 같은 체제가 다른 나라에 대한 노골적인 무시가 상식화되어 있다는 것일 테다.
선천적으로 축소지향인 그들이 후천적으로 확대를 지향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선생의 언급은 그래서 통쾌하고 또한 명쾌하다. 전범(戰犯)인 그들이 식민지로 삼은 대한민국에 대해 구체적인 사과 한 번 한 적 없고, 그 떳떳하지 못한 역사에 대한 반성으로 출판된 변변한 책 한 권 영화 한 편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지적에 공감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단순한 일본인론, 축소지향론이 아닐 것이다. 저자가 후기에서 밝혔듯 이 책은 “문필 생활을 하게 되면서부터 줄곧 이 모욕받은 역사(일제 강점)의 빚을 어떤 형태로든 청산해야 된다는” ‘유치한 복수심’과 더불어 “무엇인가 그들에게 ‘나’를, ‘한국인’을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 논리는 ‘축소’요, 핵심은 ‘일본 해부’. 이노우에 다다시의 짧은 서평은 그래서 더욱 인상적으로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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