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수염 단 이집트 여왕, 왜 아들에게 버림받았나
오마이뉴스 입력 2012.10.05 19:03
오마이뉴스 박찬운 기자]
▲룩소르 신전의 전면 모습이다. 람세스 2세의 좌상이 보이고, 오벨리스크 한 개가 우뚝 서 있다. 오른쪽에는 오벨리스크 기단만 보이는데, 바로 그 위에 있던 오벨리스크가 현재 파리 콩코드 광장에 있다. |
ⓒ 박찬운 |
이제 탑문 앞에 서 보자. 람세스 2세의 대형 좌상 2개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원래는 6개가 탑문 앞에 배치돼 있었다. 왼쪽 좌상 앞에는 25m짜리 오벨리스크가 우뚝 서 있다. 하나만 서 있는 것이 영 서운하다. 오른쪽을 보니 오벨리스크 좌대는 있는데 오벨리스크는 없다. 파리 콩코드 광장으로 옮겨진 바로 그 오벨리스크 자리다.
탑문을 들어서면 첫 번째 안뜰인데 족히 한 변이 50m가 넘는다. 이곳에는 원기둥과 함께 곳곳에 파라오의 좌상과 입상, 그리고 작은 크기의 왕비와 공주의 조각상이 들어서 있다. 비록 성한 것은 별로 없지만 당시의 위용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람세르 2세의 혼, 룩소르 신전
▲룩소르 신전 내의 람세스 2세의 좌상이다. 오른쪽 다리 곁에는 그의 아내 네페르타리가 있다. |
ⓒ 박찬운 |
▲룩소르 신전 내에 있는 투탕카멘 내외의 좌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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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안뜰의 원기둥은 파피루스 양식이다. 마치 파피루스 다발을 묶은 것 같은 모양이다. 원기둥이 있는 홀 뒤편에는 몇 개의 방이 있는데, 그 중 중심에 있는 방은 로마 황제에게 경배를 올리는 곳이다. 로마제국이 이집트를 속주화하면서 신전에 많은 변형이 있음을 알려주는 증거다. 그러고 보니 주변 벽에는 아직도 로마인들의 모습을 그린 채색화가 남아 있다.
왕들의 계곡에서 파라오의 무덤을 엿보다
▲왕들의 계곡의 전모 |
ⓒ 위키피디아 |
어떻게 해서 파라오들은 여기에 묻히게 됐는가. 그것은 도굴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역대 파라오는 사후세계를 위해 거창한 분묘사업을 벌였다. 피라미드도 그 하나가 아닌가. 그런데 세상에 공개되는 분묘는 후대에 반드시 도굴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피라미드처럼 난공불락과 같은 돌을 사용해 성소를 지키려 해도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지하분묘. 테베의 서안은 사암으로 이뤄진 지질이다. 여기에 지하 분묘를 만들고 입구를 막은 다음 시간이 지나면 그 지하에 분묘가 있는 줄은 아무도 모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수십 명의 파라오 무덤은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시간은 없는데 어떻게 62개나 되는 지하무덤을 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무덤을 관리하는 곳에서도 매일 일부만 공개한다. 내가 간 날은 세 곳이 개방됐다. 아멘호테프 4세, 람세스 6세, 그리고 람세스 9세의 묘다. 이들 지하무덤은 62호 투탕카멘 바로 인근에 있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투탕카멘묘는 특별 관리되고 있다. 일반요금에다 특별요금을 더 지불해야 들어갈 수 있다. 그럼에도 이곳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입구에 가보니 인산인해가 따로 없다.
▲람세스 9세의 지하묘 벽면의 그림 |
ⓒ 위키피디아 |
이집트의 측천무후, 하트셉수트 장례신전
▲하트셉수트 장례신전의 원경이다. 붉은 사암산 아래 있는 신전의 모습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이곳에서 카르나크 신전에 세워진 반짝이는 오벨리스크가 보였던 모양이다. |
ⓒ 박찬운 |
이곳은 외국 사람들에게 고대 유적지보다는 테러 장소로도 유명하다. 1997년 11월 17일 이슬람 무장단체가 여행객을 향해 무차별 난사를 한 곳이다. 그날 경찰관을 포함해 63명이 사망했다. 이로 인해 이집트 관광은 한동안 어려웠다. 무서운데 누군들 가고 싶겠는가. 그 여파로 지금까지 이집트는 어딜 가도 보안 검색이 심각하다. 호텔을 들어가도, 관광명소 어딜 가도, 반드시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참으로 불편하기 짝이 없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사불여튼튼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이집트 여행을 하기에 앞서 관련 다큐멘터리를 열심히 봤다. 마침 BBC 다큐멘터리를 보니 < 고대건축기행 >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이 신전을 소개했다. 붉은 사암의 병풍 아래 3층의 기둥이 퍽이나 인상적인 신전이었다. 이 신전은 멀리서 봐야 그 진면목을 볼 수 있다. 가까이 가 보면 층마다 앞에 조그만 테라스가 있는데, 멀리서 보면 그것이 안 보이고 단순히 3층 건물이다. 착시현상 때문이다.
1층과 2층 벽면에는 각종 이야기가 부조(오벨리스크의 주랑)로 새겨져 있다. 특히 1층 한쪽 벽면을 차지하는 부조는 카르나크를 단장한 여 파라오의 업적과 관련이 있는데 오벨리스크를 만드는 데 쓰이는 화강석을 구하기 위해 아스완으로 떠난 장인들의 여행 이야기가 실려 있다. 3층 회랑에 올라가면 하트셉수트의 입상이 오시리스의 형상으로 도열돼 있다. 이중관을 쓰고 가짜 수염을 달아 위엄을 한껏 발산하고 있지만 여성스러움은 어쩔 수 없다.
멤논의 거상
▲멤논의 거상이 맑은 하늘 아래에서 관광객을 맞이한다. 원래는 이 거상 뒤로 광대한 아멘호테프 3세의 신전이 있었다. |
ⓒ 박찬운 |
왜 이 좌상이 멤논의 거상이라고 불리게 됐을까. 기원전 27년 이 일대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 이 지진으로 이상한 일이 발생했는데, 이 좌상에서 아침에 해가 뜰 때마다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아마도 지진의 여파로 좌상에 금이 가고 거기에서 아침마다 바람 방향에 따라 소리가 났던 모양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소리가 트로이 전쟁에 참전한 에티오피아의 영웅 멤논이 죽고 나서 매일 아침 해가 뜰 때마다 구슬픈 탄식을 내는 소리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이 좌상의 이름은 '멤논의 거상'이 됐다.
이 기적은 고대 세계 전체에서 유명해졌다. 기원후 130년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도 이집트를 방문할 때 이곳에 들려 이 소리를 들으려고 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 소리가 복을 준다는 소문이 있었나 보다. 그런데 이 소리가 199년경부터 완전히 끊어졌다. 그것은 당시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가 이곳에 와서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했기 때문이다. 균열이 난 이 좌상을 보수하라고 한 것이다. 좋은 의도로 보수하라 했지만, 결과는 소리 없는 멤논의 거상이 되고 말았다. 이 좌상을 잘 살펴보면 이 좌상의 소재가 된 사암이 하나의 돌이라는 점이다. 어떻게 이렇게 큰 돌을 700km나 떨어진 채석장에서 여기까지 나를 수 있었을까. 또 하나의 미스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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