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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민순혜]가슴에 새긴 전화번호

가슴에 새긴 전화번호

http://news.donga.com/3/all/20111012/41026387/1

 

[기고/민순혜]가슴에 새긴 전화번호

기사입력 2011-10-12 03:00:00 기사수정 2011-10-12 03:00:00

 


 

민순혜 수필가

나는 수시로 휴대전화에 입력된 전화번호를 정리한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기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은 잊고 싶지 않아서 그냥 두기도 하는데 그중 한 명이 김정연 씨의 전화번호다. 그는 소규모 조립 컴퓨터 회사 사장으로 이미 고인이 됐다. 그러나 지금도 컴퓨터가 고장 나면 그의 전화번호부터 생각난다.

나는 컴퓨터를 오래전부터 사용했다. 요즘은 컴퓨터를 새로 구입할 때 주변기기로 스캐너, 복사기, 팩스, 프린터가 있는 복합기를 선택하지만 예전에는 대부분 각각 구입했다. 그중 하나가 고장이 나면 다른 회사 제품을 구입하기도 했다. 그러니 회사 고객센터에 애프터서비스를 신청해도 자사 제품이 아니라고 거절해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그날도 프린트를 하던 중에 컴퓨터가 멈췄다. 프린터가 컴퓨터 본체와 다른 회사 제품이어서 해당 회사에 애프터서비스를 신청할 수 없었다. 나는 전화번호부를 뒤져 컴퓨터 주변기기 수리만 전문으로 하는 곳을 찾았지만 출장비를 포함해 비용이 턱없이 비쌌다. 지인에게 하소연했더니 자신의 친구가 컴퓨터 관련 일을 한다며 그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그가 김 사장이었다. 김 사장은 전화로 설명을 듣더니 방문해 수리를 했다. 출장비도 받지 않고 부속품 가격도 아주 저렴했다. 방문 수리에다 시간도 많이 소요됐으니 수고비를 말씀하라고 해도 수줍게 웃으면서 괜찮다고 했다. 도리어 명함을 주면서 문제가 생기면 또 연락하라고 했다. 친구 소개여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 후에도 계속 부속비만 약간 받을 뿐이었다.

아마 10여 년을 주말이든 평일이든 컴퓨터가 고장 나면 밤낮없이 달려왔던 거 같다. 내가 미안해서 “컴퓨터가 너무 오래돼 고장이 잦은 거죠?”라고 하면 그는 “조금 더 사용해도 된다”며 나를 위로했다. 그렇게 말해주는 그가 무척 고마웠다. 그러나 마음뿐. 제대로 차 한잔도 대접하지 못했다. 그는 바쁜 일정으로 항상 급히 돌아갔기 때문이다.

어느 날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부팅은 됐는데 작동이 안 됐다. 나는 급히 그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번 더 전화를 했지만 연결되지 않는다는 음성 메시지만 들렸다. 이튿날 다시 전화를 했지만 똑같았다.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혹시 부도가 난 건 아닐까. 나는 지인에게 전화를 해 그의 소식을 물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하는 게 아닌가. 덧붙여 “그 친구는 아직 미혼으로 일밖에 모르더니 그렇게 됐다”며 말끝을 흐렸다. 사무실에서 밤새 컴퓨터 조립을 하고 새벽에 집에 가던 중 전봇대를 들이받고 숨졌다며 과로로 인한 졸음운전인 것 같다고 했다. 순간 김 사장의 늘 피곤한 듯했던 생전 모습이 떠올랐다.

며칠 전 인터넷 작업을 하다가 이상이 생겨 고객센터에 문의했더니 담당 직원이 원격 연결로 문제를 처리했다. 문명의 이기를 새삼 실감했다. 문제가 생기면 다시 연락하라고 정중하게 명함을 건네주던 것과는 달리 원격 연결한 직원은 자신을 번호로 소개해 마치 아바타처럼 생각되고 낯설었다. 컴퓨터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면서 수작업을 하던 김 사장이 잊히지 않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민순혜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