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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자작수필,공모 당선작

풍경사진 한 점

 

풍경사진 한 점

                                                                        민 순 혜

 

  일요일 오후. 책상 앞에 앉아 있으려니 창문으로 선들 바람이 불어왔다. 연일 35도를 웃돌던 무더위도, 절기는 어쩔 수 없는지 처서가 지나고 부터는 제법 서늘했다. 문득 벽에 걸린 커다란 사진이 눈에 띄었다. 늘 보았던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사진이었지만 오늘따라 더욱 가슴 속에 파고들어 진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오래 전, 봄볕이 따사롭게 비추던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나는 친구와 함께 공주에 있는 산성공원을 가려고 표를 사기 위해 시외버스터미널 매표구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알루미늄 가방을 어깨에 멘 노신사가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그는 의아하게 바라보는 나를 향해 ‘여행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서 그도 역시 산성공원에 간다고 했다. 전에도 몇 번 이곳에서 나를 보았노라고 덧붙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사진작가였다.

 

  그는 산성공원에 도착하자 알루미늄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들고, 그즈음 공원 안에 한참 만발한 벚꽃을 찍기 시작했다. 서너 통의 필름을 찍고 나서야 그는 카메라를 도로 가방 안에 넣으며 정리했다. 그리고는 그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우리에게 사진에 관한 이것저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주중은 직장에서 근무를 하고 주말을 이용해서 작품사진을 찍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사진을 배워보라고 권유했다. 그저 여행하는 것도 좋지만 지방마다 가진 특색이나 아름다운 것을 사진으로 남겨 놓으면 더 오래 간직할 수 있다는 거였다. 나 또한 마음 한편으로 무엇으로든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때라 귀가 솔깃했다. 며칠 후 친구와 나는 카메라를 구입했다. 그리고 버스 터미널에서 만난 사진작가 강 선생을 졸라 그가 지도하는 사진동아리 ‘포토’에 가입했다.

 

  그 당시는 요즘처럼 사진 인구가 많지 않았다. 특히 여자가 작품사진을 하러 다니는 예는 거의 없던 때라 친구와 나는 ‘포토’ 동아리 식구들 사이에서는 인기도 좋은 편이었다.

 

지금은 카메라의 기능도 다양해져서, 하나만 가지고 다녀도 충분하지만 그때만 해도 필요한대로 각종 렌즈를 다 갖고 다니며 그때그때 바꿔 끼워서 사용해야만 했다. 게다가 대전을 조금만 벗어나도 교통편이 좋지 않아 어느 때는 막차를 놓쳐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메고 밤중에 걸어서 올 때도 있었다. 어쩌다가 동아리의 승용차를 타고 갔다가 차가 논길에 빠져 혼줄이 난 적도 있었다.

 

  그렇듯 열심히 찍으러 다닐 즈음, 집에서는 야단이 났다. 다 큰 계집애가 남자들하고 어울려 다니며 그게 뭐 하는 거냐고 성화가 대단했다. 아버지는 대뜸 카메라를 갖다 버리라고 호통을 치시기도 했다. 그때는 남자친구한테서 걸려오는 전화는 아예 바꿔주지도 않을 때니 그 역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내가 사진을 찍는다고 하니까 친척이나 친구들의 결혼식, 돌, 백일, 환갑잔치에 부탁을 받게 됐다. 그때 내 나이도 이미 혼기가 지난 때라 내 걱정은 않고 남의 일만 찾아다닌다고 어머니도 역정이 대단하셨다. 그렇게 집안 식구들의 성화를 받으면서도 나는 작품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늦여름. 산과 바다 그리고 들판이 있는 서해안에 위치한 작은 마을을 갔다. 막 한여름이 자난 때여서 간혹 후끈한 열기가 바닷바람에 실려 불기도 하였지만 저 너머 넓은 들판에는 어느덧 벼이삭이 누렇게 물들고 있던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날 함께 가기로 했던 친구는 급한 일이 생겨 나는 강 선생과 둘이서만 갔다.

 

  우리는 한 나절 넘도록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어느새 붉은 해도 수평선 가까이로 기울어가고 강 선생은 늘어놓았던 카메라장비를 주섬주섬 가방에 넣었다. 광각렌즈, 표준렌즈, 줌렌즈, 망원렌즈들이 차곡차곡 정돈되었다. 그리고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근접해있는 야산으로 올라갔을 때는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온 데다, 오자마자 빛의 예술인 사진에서 가장 중요한 ‘빛’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찍었기 때문이었다. 도시락을 폈다. 바다는 고요했다. 저 멀리 돛단배도 한 척 보였다. 옆에서 한참동안 밥은 먹지 않고 멍청하게 있는 나를 보더니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어떤 일을 하다보면 힘들 때가 있어요. 그러나 그것을 참고 견뎌야 다른 일도 잘할 수 있는 거요. 어서 먹어요.”

  “예.”

  나는 힘없이 대답하고 수저를 들으니 몸이 천근이나 되는 것처럼 무거웠다. 가까스로 도시락을 먹고 보온병에 담아온 차 물을 컵에 부어 마시려고 하는데 누군가 이 쪽을 향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얼핏 보아도 마을사람은 아닌 듯했다. 이곳은 야산이기는 하나 마을에서 많이 떨어져 있어서 인적이 뜸한 곳이다. 몸이 오싹했다. 만약 강도이더라도 어떻게 대처할 수조차 없다. 사람만 해치지 않는다면 다행일 뿐이다. 간혹 한적한 곳에서 작품사진을 찍는 중에 값비싼 카메라를 도둑 맞는 일이 종종 있을 때였다.

그토록 아름답던 벌판이랑 산등성이가 갑작스레 적막으로 소용돌이쳤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우리 앞에 성큼 다가 왔다. 그들은 경찰이었다. 우리가 ‘간첩’으로 오인 받아 신고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나는 기절을 할 뻔했다. 물론 공무원인 강선생도 퍽 당황을 하였던 것 같았다. 경찰은 어쨌든 신고가 들어왔으니 일단은 조사를 받아야 한다며 지서까지 동행해 줄 것을 요구했다. 아침 일찍부터 해안에서 남녀 둘이 별로 대화도 없이 거무튀튀한 작업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모습이 수상쩍었던 것이다. 사람도 전혀 없는 곳이기에 더욱 그렇게 보였나 보았다.

 

  나는 지서 안쪽에 놓여있는 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 몸의 힘이 쭉 빠졌다. 무엇보다도 이 일을 아버지가 아신다면 뭐라고 하실 까. 아버지의 불호령이 무서웠다. 당장에 집을 나가라고 하실 테고, 어머니는 대체 이게 무슨 망신이냐고 창피해 할 테니 난감하기만 했다. 더구나 남자와 단 둘이 와서 이 모양이 되었으니 오해를 받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 까짓 사진, 당장에 그만 두어야지.” 혼잣말을 하며 입술을 깨무는데 경찰이 말했다.

  “이제 나가셔도 됩니다. 신고가 돼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마지막 버스도 이미 떠났으니 대전까지 모셔다 드리지요.”

 

  정말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만약 강 선생의 후배가 거기 가까운 곳에 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 밤을 꼼짝없이 그 지서에서 보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히 후배가 얼른 달려와 신원보증을 해 주어서 바로 나올 수 있게 된 셈이었다.

  그때 찍은 사진이 저 벽에 걸려있는 풍경 사진이다. 그것은 또한 그해 ‘충남 사진대전’에 출품을 해서 특선으로 입상을 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토록 반대하시던 아버지도 그 상장을 보시더니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해 주셨다.

 

그후 회사 일이 바빠져서 나는 휴일에도 근무를 했었기 때문에 작품 활동을 더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풍경 사진을 볼 때마다 항상 가슴이 저릿했다. 사진을 찍으러 다닌 때의 어려웠던 상황들을 단편으로 함축시킨 듯해서이리라.

 

 

 

―『대전 여성문학』(2011년)

  민순혜

대전 출생. 2010 계간『시에』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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