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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one day

눈오는 날의 추억

눈오는 날의 추억

- 민순혜

 

이른아침. 짙은 회색빛 하늘에서 눈이 성글게 흩날리고 있다. 첫눈이다. 거실 유리창에 달린 꽃무늬 실크 커튼을 한 쪽으로 밀어놓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밖은 적막하리만큼 고요했다. 일요일이어서 다들 늦잠을 자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주방으로 가서 머그잔에 핸드 드립 (Hand-Drip) 커피를 가득 뽑았다. 독일산 카이저 커피 향이 때마침 FM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과 어우러져서 눈 오는 날의 정취를 한층 더하게 했다. 그때였다. 전화벨이 울린 건. 문득 B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급히 전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상대편은 내게 기차 시간을 물었다. 잘못 걸려온 전화였다. 허탈한 심정으로 전화기를 도로 제자리에 내려놓는데 불현 듯 몇 년 전 B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도 눈이 오던 날이었다. 아침나절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번호를 보았지만 모르는 번호였다. 전화벨은 계속 울렸다. 나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받았는데 뜻밖에도 B였다. 은행원인 그는 독일 어느 지점에서 몇 년간 해외근무를 마치고 그 즈음 귀국했다고 말했다. 내가 채 뭐라고 말할 사이도 없이 그는 저녁에 차라도 한잔 하자며 채근했다.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사실 나도 그동안 그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다. 자주 만났던 그와 갑자기 헤어진 것도 따지고 보면 나의 성급한 성미(性味)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참에 내 진심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는 나보다 두 살 아래이지만 대전독일문화원에서 ‘입문 독일어’ 강좌를 수강하면서 친해졌다. 1년 정도 같이 공부했는데 수강생은 대부분 유학, 해외여행, 해외파견근무 등, 독일행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 강의 시간에는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주말에도 우리끼리 스터디를 하며 독일어 습득에 열정을 쏟았다. 그와는 스터디를 하면서 더욱 각별해진 것 같다. 그는 진급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1등을 하면 자신이 원하는 지역으로 해외근무도 신청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업무가 바쁜 때문이어선지 매번 제대로 예습과 복습을 해오지 못해서 늘 허둥지둥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솔선해서 단어 뜻을 알려주고 발음도 정정해주어서인지 내게 무척 고마워했다. 나 또한 독일로 유학을 가 있는 남동생한테 휴가기간에 방문 할 계획이어서 독일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성격이 자상하고 쾌활한 편으로 스터디 멤버들한테도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나 역시 그를 친한 친구처럼 격의 없이 대했다. 특히 수업 중에 졸립기라도 하면 자판기 커피를 뽑아 오라는 심부름은 단골로 시켰다. 뿐만 아니라 휴일에 테니스 게임도 자주했는데 그때마다 개인 경기에서 그에게 내가 이겨서 오뎅이나 떡볶이 등 맛난 것을 얻어먹었다. 게임 중에는 자주 언성을 높이면서 다투다가도 일단 승부가 결정된 후에는 화해를 하고 그렇게 우의가 깊어 갔었던 것 같다.

 

그해 12월 내 생일날이었다. ‘스터디’ 멤버들이 서로 생일을 챙기던 때여서 내 생일날도 케이크를 사들고 멤버들과 함께 동학사에 갔다. 내 생일은 한겨울로 매년 함박눈이 쌓였는데 그날도 온 세상이 새하얗게 덮여 있었다. 눈 쌓인 오솔길을 걸어가는데 그의 눈빛이 여느 때와 달라 있었다. 그는 한 달 후 독일로 출국할 예정이었다. 그는 내게 독일에 같이 가자고 했다. 그곳에서 나와 같이 공부를 더 하고 싶다면서 독일은 학비가 없으니까 큰 부담 없이 학업을 계속 할 수 있다고 틈만 나면 권유를 했다. 자신이 후원자가 되어 주겠다고 까지 말했지만 공부에 그다지 흥미가 없던 나는 그런 그가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나는 그때마다 허공에 대고 말했던 거 같다. “너한테 관심 없어.” 라고.

 

그는 독일에 도착해서도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전화를 해서 빨리 수속해서 그곳으로 오라고 성화를 해댔다. 어디그뿐인가, 실제 가보니 공부하는 여건이 더 좋다면서 어학연수 프로그램을 보내오기도 했다. 나는 차츰 그런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꽉 막힐 것만 같았다. 그가 쫒아 올까봐서 남동생한테 가는 것도 보류했다. 그에게서 오는 전화는 일체 받지도 않고 그의 메일도 차단했다. 국내에 있는 그의 친구가 그가 무척 상심해 있다는 말을 몇 번 전해 들으면서 그는 나의 뇌리 속에서 차츰 잊혀져 갔다.

 

간간히 그의 친구를 통해 그의 소식을 전해 듣기는 했다. 3년 기간으로 독일에 갔는데 해외 근무를 연장해서 독일에 더 머물게 되었다고. 그 후 그는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공부를 더 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눈이 내리는 날이면 가끔 그의 생각이 나곤 했다. 그런데 그날 갑자기 전화가 온 것이었다. 그와는 단지 독일어 강좌를 같이 수강했을 뿐인데도 어릴 적 학창시절 같아서였을까, 스터디를 하면서 자주 다투며 즐겁게 공부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저녁시간, 약속장소는 연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였다. 그는 약간 말랐지만 오래전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그의 옆에 앉아 카메라 셀프타이머를 작동 시켰다. “야, 우리 사진 찍자!” “으~응, 그래... 넌, 여전하구나...” 그의 눈빛은 오래 전 동학사 계곡 눈 쌓인 오솔길에서 바라보던 눈빛과 조금도 다름없이 따스했다. 그는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카이저 커피봉지가 들어있는 종이 봉투였다. “와우, 커피네, 고마워!”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커피를. 그런데 그의 표정은 의외로 착잡했다.

 

그때 웨이터가 레스토랑에서 서비스하는 것이라면서 레드 와인 두 잔을 가져왔다. 와인에 비친 그의 얼굴이 붉었다. 건배를 하는데 유리잔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와인잔을 들은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순간 그의 손가락에 낀 다이아몬드 반지가 현란하리만치 반짝거렸다.

“어? 너 결혼했구나!”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