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전 회덕 동춘당(大田 懷德 同春堂)
-종 목 보물 제20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전 대덕구 동춘당로 80 (송촌동)
-소유자(소유단체) 송영진
조선 효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1606∼1672)선생의 별당(別堂)이다. 늘 봄과 같다는 뜻의 동춘당(同春堂)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것으로 이곳에 걸린 현판은 송준길 선생이 돌아가신 6년 후 숙종 4년(1678)에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조선시대 별당 건축의 한 유형으로, 구조는 비교적 간소하고 규모도 크지 않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평면으로는 총 6칸 중 오른쪽 4칸은 대청마루이고 왼쪽 2칸은 온돌방이다.
대청의 앞면·옆면·뒷면에는 쪽마루를 내었고 들어열개문을 달아 문을 모두 들어 열면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의 차별없이 자연과의 조화를 이룬다. 또한 대청과 온돌방 사이의 문도 들어 열 수 있게 하여 필요시에는 대청과 온돌방의 구분없이 별당채 전체를 하나의 큰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건물의 받침은 4각형의 키가 높은 돌을 사용했는데, 조선 후기의 주택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동춘당은 굴뚝을 따로 세워 달지 않은 것이 특징인데, 왼쪽 온돌방 아래 초석과 같은 높이로 연기 구멍을 뚫어 놓아 유학자의 은둔적 사고를 잘 표현하고 있다. 즉, 따뜻한 온돌방에서 편히 쉬는 것도 부덕하게 여겼기 때문에 굴뚝을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유학적 덕목을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이 건물은 조선(朝鮮) 효종(孝宗) 때 대사헌(大司憲),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선생이 낙향하여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별당(別堂)으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조선시대 별당 건축의 한 표본으로 들 수 있으나, 구조는 비교적 간소하고 규모도 과히 크지 않다. 오른쪽 4칸이 대청이 되고 왼쪽 2칸이 온돌방인데, 전면에는 쪽마루를 깔았으며 온돌방의 벽 아래 부분에는 머름을 대었다. 주춧돌은 사각형의 귀가 높은 초석을 사용하였는데,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주택(住宅) 건물(建物)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樣式)이다.
▶송준길 (宋浚吉)-브리태니커
1606(선조 39)~ 1672(현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문묘(文廟)에 배향된 해동18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송시열(宋時烈)과 더불어 서인 노론을 이끌었다. 본관은 은진.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아버지는 영천군수를 지낸 이창(爾昌)이다. 어려서부터 친척인 송시열과 함께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하면서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각별한 교분을 맺어나갔으며, 20세 때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과 예학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다. 1624년(인조 2) 진사가 된 뒤, 학행으로 천거받아 1630년 세마에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내시교관·동몽교관·시직·대군사부·예안현감·형조좌랑·지평·한성부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1633년 잠시 동몽교관직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20여 년 간 벼슬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에만 전념했다.
청서파(淸西派 : 인조반정에 가담하지 않은 서인세력)에 속했으며,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을 이조판서에 기용하는 등 척화파와 재야학자들을 대거 등용할 때 송시열 등과 함께 발탁되어 부사직·진선·장령 등을 거쳐 집의에 임명되었고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집의로 있으면서 송시열과 함께 효종의 북벌계획에 참여하는 한편, 인조말 이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공서파(功西派 :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운 서인세력)의 핵심인물인 김자점(金自點)·원두표(元斗杓) 등을 탄핵하여 파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김자점 일파가 효종의 북벌정책을 청(淸)에 밀고하여 그와 송시열 등 산당(山黨)은 청의 압력으로 모두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뒤 집의, 이조참의 겸 찬선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리에 묻혀 지냈다. 1658년(효종 9) 대사헌, 이조참판 겸 좨주를 거쳐 이듬해 병조판서·지중추원사·우참찬에 임명되어 송시열과 함께 효종의 측근에서 국정을 보필했다.
1659년 효종이 죽은 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둘러싸고 이른바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그는 송시열의 기년복(朞年服 : 만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 주장을 지지하여 논란을 거듭한 끝에 남인의 윤휴(尹?)·윤선도(尹善道)·허목(許穆) 등의 3년설(만 2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 주장을 물리치고 기년제를 관철시켰다. 이어 이조판서·우참찬·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기년제를 규탄하는 남인들의 거듭되는 공격으로 1665년 원자(元子)의 보양을 건의하여 보양관(輔養官)으로 잠시 봉직한 것을 제외하고는 관직에 발을 끊고 회덕에 머물러 살면서 여생을 마쳤다.
▶송준길의 장가들기 일화
송준길은 이유태 송시열과 함께 김장생의 수제자들이었다. 당시 기호학파의 거장이었던 김장생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고 있던 어느 날, 상주의 학자이고 영남학파의 정경세가 송준길의 집을 찾아왔다. 학자로 이름 높은 김장생의 문하에서 공부하는 청년 중에서 자신의 사위를 찾으려고 온 것이다.
김장생의 집에는 늘 손님이 끊이지 않았었다. 정경세는 공부방 문을 갑자기 휙 열어보고 청년들의 동정을 살펴보기로 했다. 이유태는 누워서 쉬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어느 선비의 방문을 받고 당황하여 버선발로 뛰어나가 인사를 하였고, 송시열은 책을 보고 있었는데 이 예의없는 사람을 그냥 멀뚱히 쳐다보다가 무시하고 그냥 책을 보았다.
송준길은 앉아서 쉬고 있다가 일어나서 간단히 고개 숙여 인사하였다. 정경세는 호들갑스럽지도 거만하지도 않게 예를 갖춘 송준길을 중용의 덕을 갖추었다고 판단하고 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송준길의 부인이 된 정경세의 따님은 매우 못생긴 얼굴이었다고 한다. 그 시대에는 색시신랑이 얼굴한번 안 보고 첫날밤에 "처음 뵙겠습니다" 했을 테니 놀랐을 것이다 `후회해도 소용없지만 송준길이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색시가 지혜롭고 마음이 넓어 받아들이고 살았다.
▶송용억가옥(宋容億家屋) -대전광역시 민속문화재 제2호
동춘당 송준길의 둘째 손자 송병하가 분가하면서 살기 시작하여 현재 11대손 까지 살아오고 있는 집이다.
이곳은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가는 여류문학사의 공백을 메꾸어 줄만한 여류 문인인 호연재 김씨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송병하의 며느리인 호연재 김씨는 여성 특유의 감성을 담은 많은 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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